사다리 걷어차기 혹은 내로남불[MT시평]

안재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2.09.06 03:45

[기고]안재빈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지난달 중순,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에 서명하였다. 최근 급등하고 있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위한 법안처럼 들리지만, 법안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당장의 인플레이션 억제와는 크게 상관없는 의료, 복지 및 기후변화 대응 정책들로 채워져 있다. 그중에서도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도입된 전기차 보조금 관련 항목들은 자국 중심의 산업정책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세액공제의 형태로 보조금이 지급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해당 법안이 한미 FTA 규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간의 산업 및 무역정책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고려해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주요 선진국들은 산업정책의 폐해를 적극적으로 설파하고, 산업정책을 시도하는 일부 국가들에는 직접적인 경고를 숨기지 않는 등 반(反)산업주의 기조를 공고히 해왔다.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저해한다는 이유가 제시되었다. 미국의 경제학 교과서들에는 중남미국가들의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이 실패한 산업정책 사례로 빠짐없이 등장하곤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구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채택하여 직간접적으로 개발도상국들의 관세 인하 및 무역자유화를 유도하는 한편, 자유무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무역 규범 체계 확립을 선도해 왔다. 특정 산업에 보조금 등의 특혜를 주는 것으로 의심되는 국가들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및 세계무역기구(WTO)의 보조금에 관한 협정을 근거로 적극적으로 상계조치를 시행해 왔다. 일례로, 한국의 철강제품은 한전에서 공급받는 전기료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은 것이 보조금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미국으로의 수출품에 높은 상계관세가 부과되곤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번 법안의 전기차 보조금 관련 항목은 기존 수입품을 국산 생산품으로 대체한다는 중남미국가들의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관세 이외의 추가적인 방식으로 수입품을 국산품과 차별하는 내용은 그동안 신봉하고 강요해온 자유무역주의 기조에도 어긋난다. 트럼프 정부 당시 미중 통상분쟁을 촉발한 여러 이유 중에는 중국의 보조금 문제와 중국 내 외국기업에 대한 차별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점에서 '내로남불'이라 비판받을 여지가 크다.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내로남불' 경제정책은 비단 이번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이 수행한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비판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뿐더러 자국 통화가치를 하락시켜 수출품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의심받아온 중국의 환율조작 행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쟁촉진과 자유시장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우리와 같은 신흥시장 국가들의 금융시장 규제 완화를 요구해 왔지만 정작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후로는 그동안 비판해온 금융시장 규제를 거시건전성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오히려 강화하기도 하였다. 국가부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다가도 정작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로존 위기 등으로 경기침체가 이어지자 재정건전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고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였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주요 선진국들의 행태를 두고 '사다리 걷어차기'라 비판한 바 있다. 최근 들어 빈번해지고 있는 일련의 내로남불 정책들을 보면서 이제 사다리를 걷어차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만의 견고한 새로운 사다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안재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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