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멜랑콜리아'의 슬픔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2025.03.04 02:05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매섭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다. 추위와 일조량 부족은 활력을 떨어뜨리고 긴 밤은 오히려 수면장애를 일으킨단다. 이러한 무기력증과 피로는 왜 겨울에 우울증이 많은지를 설명한다. 물론 우울증의 요인은 계절적 환경 외에도 개인적인 경험이나 고민부터 정치·사회적인 이슈와 논란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1917년 '우울과 애도'를 발표한 프로이트 역시 그렇게 넓은 관점에서 여러 정신문제에 천착했다.

초기 연구는 주로 개인의 심리에 관한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주류가 된 부르주아의 가족구조 아래 억압된 욕망에서 기인한 히스테리 연구가 대표적이다. 20세기로 넘어가면 집단의 심리상태가 좀 더 전면에 등장한다. 트라우마는 물론이고 억압과 무의식에 대한 연구도 궁극적으로는 문명화된 사회라는 환경이 중요하다. 나치즘이 태동한 시기에는 유대교의 유일신앙과 민족기억의 관계를 풀어보기도 했는데 이 모두는 프로이트가 인간 정신기관의 활동을 역사나 현실사회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울증 연구도 1차 세계대전이라는 당시 현실과 무관치 않았다. 그에 따르면 '우울과 애도'는 우리가 상실에 대처하는 2가지 다른 태도다. 무의식이라는 날것의 에너지를 현실에 조율하려는 정신기관의 활동에서 우울은 현실부정에 관계하고 애도는 현실과의 타협으로 나타난다. 상실이란 연인과의 이별일 수도, 가까운 이의 죽음일 수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일 수도 있다. 그렇게 떠나보낸 자리에 일종의 의식화된 감정으로 들어선 것이 애도다. 예를 들어 장례의식은 상실에 대한 슬픔을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수용하게 하고 충분히 애도하게 함으로써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자를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회복시키는 장치다.

반면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에 반응하는 충동이 억압되기 때문에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신 우울의 증상이 나타난다. 때로는 자책이나 자기비하로 나타나고 때로는 외적 현실에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전자는 폭력성과 자기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지만 후자 역시 외부 세계와 단절되며 극도의 무기력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분석가(정신과 의사)는 우울증 환자로부터 최대한의 반응을 끌어내야 한다고 프로이트가 주문한 이유다. 결국 우울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사망자를 낸 세계대전은 프로이트가 고민한 집단적 우울의 배경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이다. 우울도 일상처럼 반복된다. 우울이나 트라우마는 의식 너머에서 작동하기 때문일까. 아무리 반복돼도 학습되지 않는다. 미디어 탓도 적지 않다. 불필요하게 디테일한 정보로 대중이 경악하고 돈을 위해 우울한 뉴스들을 재가공하며 이유 없는 분노와 순수하지 못한 연민을 소비시킨다.

우울함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어째 점점 더 우울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슬픔을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것처럼 우울도 그 바닥까지 살펴봐야 한다. 누군가 말했다. "물이 빠져나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화려함이 걷히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힘들지만 우울한 때야말로 평소 감춰왔던 나약함과 불안을 마주하고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라는 그림에서처럼 우울한 자는 외부의 그 어느 것도 아닌 자기 내면만을 향하는 상념에 빠진다. 어쩌면 거기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잃어버린 것들에 소리 내어 울더라도 부디 우울함에 우울해 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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