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그레이스 호퍼와 컴퓨터 버그 이야기

권기균 과학관과문화 대표·공학박사
2025.09.22 02:05
(사)과학관과문화 대표, 공학박사 권기균

"마크2(MarkⅡ)를 디버깅하던 시절이었어요. 작업실 건물 창문에 방충망도 없어 밤이면 온갖 벌레가 날아들었죠. 어느날 컴퓨터가 멈춰 원인을 찾았더니 날개 길이가 10㎝ 넘는 나방이 릴레이 안에서 죽어 있었어요. 우리는 그것을 꺼내 작업일지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뒀죠. 그리고 '실제 버그가 발견된 첫 번째 사례'라고 적어뒀어요." 이 말은 당시 현장의 팀원이었던 그레이스 M 호퍼(1906~1992년)가 1968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구술 인터뷰에서 직접 전해준 이야기다. 1947년 9월9일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훗날 컴퓨터업계의 전설이 됐다. 메모와 나방이 붙어 있는 그 작업일지는 지금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역사박물관(AMNH)에 소장돼 있다. 훗날 여러 강연에서 그녀는 이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전하며 '버그'와 '디버깅'이라는 말을 대중에게 각인해줬다.

사실 '버그'라는 단어는 이미 1870년대 토머스 에디슨이 전기장치의 결함을 지칭하며 사용했다. 그는 결함을 '버그'로, 결함을 방지하는 것을 '버그트랩'이라고 부르며 결함을 찾아내는 과정을 발명의 일부로 여겼다. 호퍼의 나방 사건은 이 오래된 표현을 20세기 디지털 세계로 되살린 것이었다.

1940년대 언론은 새로 등장한 거대한 계산기를 '생각하는 기계'로 불렀다. 1944년 '뉴스위크'는 테이프 펀치를 들고 있는 호퍼의 사진에 '싱크머신'(Think Machine)이라는 문구를 달았다. '보스턴데일리글로브'(1947년)는 '기계가 모든 답을 알고 있는데 왜 공부해야 할까'라는 기사도 실었다. 사실 하버드대 마크1(1944년)은 길이 15m, 무게 5톤의 전기·기계식 장치였다. 덧셈은 1초에 세 번, 곱셈은 한 번에 6초가 걸렸다. 수학자 수십 명이 할 계산을 몇 시간 만에 끝냈다. 마크2(1947년)는 무게 13톤, 길이 24m. 더 크고 빨라 곱셈을 0.5초에 해냈다. 그러나 길이 30m, 무게 30톤, 진공관 1만7468개로 구성된 ENIAC(1945년)은 초당 5000번의 덧셈을 해냈고 '계산기'가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컴퓨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UNIVAC(Universal Automatic Computer·1951년)는 ENIAC의 뒤를 잇는 최초의 상업용 전자식 컴퓨터였다. 오늘날 컴퓨터와 비교하면 성능은 보잘것없지만 당시엔 과학과 전쟁의 판도를 바꿀 혁신이었다. 호퍼는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마크1과 마크2 등 마크 시리즈의 핵심 인물이었다.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인 UNIVAC의 프로그램 개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최초 '컴파일러'를 고안해 기계어 대신 영어 같은 언어로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게 했다. '컴퓨터는 수식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라는 그의 철학과 비전은 '코볼'(COBOL) 개발의 동력이 됐다.

그는 유머로도 유명했다. 강연 때마다 30㎝ 전선을 꺼내들어 "이 길이가 전자가 1나노초 동안 이동하는 거리"라고 설명했다. 호퍼의 흔적은 스미스소니언에 '그레이스 호퍼 컬렉션'으로 남아 있다. 1940년대 언론기사, 강연원고, 개인노트가 보존돼 당시 대중이 '기계적 두뇌'에 가졌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생생히 전한다. '뉴스위크'의 '싱크머신' 기사부터 UNIVAC가1952년 미국 대선을 예측한 기록까지 초기 컴퓨터가 사회와 정치까지 흔들던 순간이 담겨 있다. 호퍼는 기업에서 다시 미 해군에 복귀해 소장까지 진급했다. 여성으론 드물게 해군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래서 미 해군은 신형 구축함을 '호퍼'(Hopper)로 명명했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녀의 사후에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 그녀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됐다. 존경을 담아 그녀를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혁명이 삶을 바꾸고 있다. 그 출발점엔 1947년 9월9일 릴레이 속 나방 사건이 있었다. 그 작은 벌레가 호퍼의 손을 거쳐 '버그'라는 상징으로 남았고 기술은 사람의 언어와 만나 비로소 혁신이 됐다.

1947년 9월 9일, 실제로 발견된 첫 번째 컴퓨터 버그가 기록된 작업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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