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이면 여의도에서 한강 불꽃축제가 열린다. 20대의 어느 가을날 동작대교를 걷다가 멈춰 서서 밤하늘을 수놓은 불의 꽃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린 적이 있다. 드넓은 한강 유역을 두루 찬란하게 비추는 오색의 불빛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 뒤로는 좀처럼 축제의 불꽃을 보지 못했다. 생활이 바쁘고 어쩌다 여유가 생기더라도 많은 인파가 부담스러웠다. 축제가 열리는 날 서울에 있으면 펑, 펑 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들으며 상상했다. 불꽃의 광활한 날개를.
너무 거대하고 아름다워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땅과 하늘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장엄한 고봉이나 물의 절벽을 세우며 달려드는 거센 파도, 온몸으로 영원히 쏟아져 멈춘 듯 보이는 폭포 앞에서 말을 잊는 것처럼 불꽃축제의 커다란 불꽃들은 뭐라 명명할 수 없이 그저 '불꽃'이라는 확정된 기표로만 발음하게 된다. 수많은 군중의 얼굴을 일제히 금빛으로 물들이며 터지는 불꽃은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요즘도 아이들이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서 작은 불꽃놀이를 하는지 모르겠다. 명절이면 저녁밥상에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골목길이나 놀이터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문구점에서 산 폭죽을 터뜨리며 놀았다. 요즘은 문구점도 다 사라졌거니와 폭죽은 화재와 화상 등의 위험으로 아이들이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안전을 생각하면 잘된 일이고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면 아련해진다.
팽이탄, 나비탄, 로켓탄, 분수대 같은 이름의 작은 폭죽들이 피워낸 불꽃들은 아이들의 손 위에서 새처럼 지저귀곤 했다. 불꽃에다 새, 강아지, 물고기의 이름을 붙여주면 빛과 열기를 다 쏟아낸 폭죽에서는 금세 비린 연기가 났다. 불꽃을 오래 보면 눈 속에 물고기가 헤엄쳐 오는 것 같다고 한 친구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유년의 어두운 놀이터는 예쁜 날개를 가진 불꽃들이 모빌처럼 흔들리는 꿈의 요람이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의 미학'에서 "불꽃은 우리들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 불꽃 앞에서 꿈꿀 때, 사람이 상상한 것에 견주어 본다면 사람이 인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꽃은 그 은유와 이미지의 가치를 매우 다양한 명상의 영역 안에 두고 있다. 불꽃은 몽상하는 이에게 하나의 세계다. 불꽃의 몽상가가 불꽃을 향해 말한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는 시인인 것이다"라고 했다. 각자의 손안에서 피어나는 불꽃에다 아무 이름이나 붙이며 행복했던 유년의 불꽃놀이는 기성의 질서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계였던 셈이다.
유년의 마지막 불꽃놀이는 친구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으면서 종료됐다. 울면서 집으로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불꽃은 더이상 새도 물고기도 아니었다. 위험한 인화성 물질이며 어른들이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그날 밤 TV에서는 새해를 기념하는 거대한 불꽃이 밤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 불꽃들은 너무나 커서 그저 '불꽃'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고 나는 두 달 뒤 중학교 교복을 입었다. 확정된 의미와 제도의 세계인 상징계로 완전히 들어선 것이다.
그 작고 예쁜 불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불꽃축제의 폭죽이 터지는 굉음을 멀리서 들으며 문학평론가 김현이의 산문집 '사라짐, 맺힘'에 쓴 '불빛이 말하는 이유'라는 글을 생각했다. "나는 그때 눈물 어린 눈자위로 큰 불빛을 쳐다보며 소리쳤었던 것이다. '안녕'이라고. 사실 이 엄청난 불빛의 대화 앞에서 내가 자신 있게 뱉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단어는 해후를 알리는 '안녕' 이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 아닌가. 그래 나는 한없이 부르짖고 있었다. '안녕 안녕'이라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은 왜 아름다운가. 잠깐 타올랐다가 꺼진 그 불꽃들은 사라졌지만 맺혀 있다. 반짝이는 불꽃에 얼비친 미소가 예쁘던 너는 잘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