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석습'(朝花夕拾)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한 말이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는 이 말에는 은은한 향기가 있다. 지난밤 가지에서 떨어진 꽃은 이른 아침 거리를 청소하는 이의 빗자루에 쓸려 쓰레기통에 담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루쉰은 말한다. 아침에 떨어진 꽃을 바로 줍지 말고 저녁까지 두라고. 비록 낙화일지언정 아직 가시지 않은 빛과 향기를 한나절 충분히 발산하도록 둔 후 저녁에 주우라고. 그 사이 나비와 개미가 떨어진 꽃 주위로 와 놀고 구름의 밀려옴과 밀려감에 따라 달라지는 명암이 꽃을 뜻밖의 정경으로 만들 것이다. '조화석습'의 진정한 미덕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대신 입체적 내부와 사실의 전모가 다 파악될 때까지 확정을 유보하는 관용과 지혜로움에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 기다림을 기대하기 어렵다. 낙화는 바로 수거돼 버려진다. 아니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꽃조차 막무가내로 꺾여 던져진다.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이 성급히 사실로 오도되고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나기도 전에 확증편향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정서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소위 '사이버레커'와 가짜뉴스가 온라인에 넘쳐나는 것도 사람들이 서둘러 아침 꽃을 줍기 때문이다. 지역, 세대, 성별, 직업, 이념 등으로 타인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것도, 어떤 이슈가 생겼을 때 사실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론몰이로 누군가를 매장하는 것도 다 아침 꽃을 아침에 꺾는 폭력이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1'에 이렇게 쓰여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아침 골목에 떨어진 꽃과 해질녘 노을이 엎질러진 골목에 놓인 꽃은 같지만 다른 꽃이다. 생각과 마음도 그러하다. 똑같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지만 아침 생각과 저녁 생각이 다르다. 아침 마음과 저녁 마음이 다르고, 아침 사랑과 저녁의 사랑 또한 그 온도와 결이 다르다. 세상의 일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마디 말이나 표정 하나로,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정면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측면과 후면은 물론 내부까지 다 봐야 겨우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섣불리 판단하고 확정하지 말자.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다수가 절대 옳은 것만은 아니다. 내 주관적 감정은 진리가 아니고 그 또한 변하는 것이다. 싱어송라이터 손지연은 노래한다. "어차피 영원하진 않을 텐데 내가 널 미워하는 것도"('실화')라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다. 나무는 무성하던 초록 잎을 떨어뜨리고 서둘러 어두워진 저녁은 쓸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겨울은 사람의 온기를 바짝 끌어안고 함께 마음을 덥힐 수 있는 계절이다. 첫눈의 고요한 아름다움과 성탄의 축제도 우리를 기다린다. 겨울은 봄의 마중물이다. 얼어붙은 땅 아래로 잔잔한 물소리가 곧 흐르고, 동짓날이 지나면 팥죽 같은 어둠도 한 겹 벗겨져 조금씩 해가 길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겨울의 측면, 겨울의 뒷면, 겨울의 내부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11월의 어느 아침, 나는 테라스에서 지난 계절 동안 화사한 빛을 뿜어내던 수국을 오래 바라본다. 봄에 앙상한 묘목을 화분에 심었는데 여름 한철 내내 풍성한 꽃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라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 이제 꽃은 다 시들어 빛바랜 드라이플라워처럼 푸석해졌고 화분을 가득 덮었던 푸른 잎사귀들도 떨어져나갔다. 여름 전성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나는 화분을 눈에서, 마음에서 치우는 대신 그 자리에 그대로 두려 한다. 곧 첫눈이 내리면 수국은 눈꽃의 차갑고 맑은 아름다움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겨우내 눈 녹은 물을 마시고 내년 늦봄이면 다시 작고 예쁜 꽃봉오리를 틔워낼 테다. 그때까지 아침 꽃을 절대 아침에 줍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