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국민연금엔 안어울리는 '전략적 모호성'

김지훈 기자
2026.06.02 05:30

"공약을 폐기하지도, 행동에 옮기지도 않는 게 베스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당시 국가 대외 정책에 관여하던 고위 관계자는 주한미군 사드(THAAD) 확충 안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드 확충은 대선 공약이었다. 하지만 실행하지 않고 가능성만 열어두면 대중국 회유·압박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지렛대로 작용한다는 분석이었다. 이른바 '전략적 모호성'이다. 실제 사드 확충안은 당시 인수위에서 국정과제로 명문화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식 철회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핵 억제 교리도 모호한 영역에 있다. 미국은 2022년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서 '핵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문구 채택을 검토했다가 이를 철회했다. 기준을 구체화하지 않은 채 미국이 핵 무기를 선제 사용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한국 등 동맹이 전략적 모호성을 요청한 결과로 알려져 있다.

국민연금을 취재하며 사드와 NPR이 떠오른 건 전략적 모호성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전략적 모호성을 높이겠다며 환헤지와 관련한 탄력적 집행 방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용인하는 환율 상한, 환헤지 산식이 비공개 영역에 들어갔다.

최근엔 국내 주식보유비중 허용 범위 상단도 비공개 처리했다. 글로벌 증시 벤치마크(대표지수) MSCI ACWI에서 코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2% 안팎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장은 18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 기금의 30%나 국내 주식에 쏠린 상태로 추산한다. 이 의사 결정 과정(국내주식 비중 상향)도 지난 1월 비공개 처리됐다. 출자한 사모펀드 명칭마저 투자전략 노출을 이유로 비공개하고 있다.

물론 운용 수익 극대화를 위해 매매 시점과 규모를 얼마간 감출 수는 있다. 그러나 비공개 일변도로 향하는 게 과연 국민 노후자금 운용에 맞는지 논의는 충분치 않았다.

전략적 모호성은 가상의 적대적 상대를 상정한 전략이다. 국내 일부 외환 트레이더들은 국민연금의 원화 매수 능력을 믿고 원/달러 하락(원화 강세) 포지션을 잡았다가 환헤지 작동 여부가 불분명해지면서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연금이 누구를 상대로 상정하고 환헤지 전략 모호성을 높인 건지 의문이 드는 이유다. 국민연금이 어떤 범위까지 전략적 모호성을 선택해도 되는지 이제는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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