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한 논문에서 자산 가격의 패닉이 스스로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자산의 가격이 일정 수준을 넘어 하락하면 손절매를 부르고, 그로 인한 매도는 더 큰 폭의 가격 하락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장의 자산에 대한 신뢰가 강하면 가격 하락은 저가 매수의 기회가 된다. 우량 자산의 가격 하락은 저가 매수를 자극해 가격 하락은 단기에 그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의 가격은 장기평균 수준을 회복한다.
문제는 자산에 대한 신뢰가 약할 때다. 자산이 저평가되었다고 믿고 매수했지만 다수의 다른 투자자가 공격적으로 매도해 가격이 폭락하면 매수자는 혼란에 빠진다. 가격이 추가 하락해 손실이 빠르게 증가하면 공포에 사로잡힌다.
폭락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면 가격 하락이 또 하락을 초래하는 악순환에 접어든다. 시장에는 매수세가 실종되고 패닉으로 인한 매도세는 점점 강해진다. 위험을 줄이려고 선택한 손절매와 파생상품이 역설적으로 시장의 패닉을 더욱 확대한다.
시장 패닉은 매수 수요의 증발을 통해 거래 자체가 고갈되는 '유동성 블랙홀' 상태로 이어진다. 외환위기 당시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주식 매도와 원∙달러 환율 급등이 좋은 예다. 1997년 종합주가지수는 300 포인트가 붕괴했고 원∙달러 환율은 2000원에 육박했다.
그해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하자 우리나라의 경제 펀더멘털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설상가상 환율 방어에 실패한 태국의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어 바트화가 폭락하자, 한국 시장에 투자한 외국인도 경계심이 커져 주식을 매도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하나둘 국내 증시 탈출 대열에 합류해 달러를 매수했다. 이로 인해 원화 약세가 심해지자 외국인은 환손실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주식을 매도했다. 매도 대금을 달러로 바꾸자 원화 약세는 더 깊어졌다.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이 동시에 유동성 블랙홀에 빠졌다.
최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500원대를 훨씬 상회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원화 약세 이유도 당시와 유사하다. 외국인이 대규모로 국내 주식을 매도해 달러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환율이 급등했다. 그런데도 외환당국은 느긋해 보인다.
1997년에는 패닉으로 인한 자산 매도가 촉발한 외환위기였던 반면, 현재의 원화 약세는 크게 오른 주식을 팔아 차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라 본다. 외환시장 거래시간 연장 등 제도적 개선을 통해 투기를 억제하면 환율이 안정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관점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외국인 주식 순매도가 환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율 상승이 역으로 국내 주식 매도를 촉발한다는 측면을 경시하고 있다. 환율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가 확산하면 악순환은 더욱 심각해진다.
물가 상승 압력이 강해지고 있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인상해 한미 금리격차의 역전이 깊어지고 주식마저 하락기에 접어들면 원화 약세는 유동성 블랙홀로 이어질 수 있다. 한은의 선제적∙보험적 금리 인상이 원화 약세를 막는 근본적 처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