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구 온난화가 음모론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 의견을 대변하는 학자나 정치인들도 있었는데, 대체로 그들은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체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네팔의 빙하가 무너져 일어난 대참사와 국토가 물에 잠겨가는 투발루의 비극을 보면 지구상의 환경과 기후는 온갖 조건이 맞물려 유기적으로 변화해 가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기후가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지난 백 년간 인간이 기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그리 큰 변화나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긴 순환과 변화의 타임라인에 맞춰 진화해 온 생명체들은 멸종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은, 특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며 환경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국가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잔인하고 무책임한 이 결말이 역설적으로 자연의 이치 같기도 하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들기 시작한 에코백은 어느새 패션 아이템으로 전락했다. 오히려 에코백 시장만 비대해져 개인이 십수 개의 에코백을 소유하는 기괴한 풍경이 벌어졌다. 에코백이 비닐봉지보다 환경적 가치를 지니려면 최소 수백 번에서 수만 번은 재사용해야 그 제작 과정의 탄소 배출을 상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에코백을 끝없이 소비하고 있으며, 시장에는 또 얼마나 많은 에코백이 만들어져 유통되고 창고에 쌓여 있을까. 낡은 포대나 자투리 면을 재활용하던 선의의 실천이 어느새 인간의 죄책감과 양심을 파고든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씁쓸한 전개다.
일론 머스크가 외치는 '화성이 인류의 미래다'라는 구호 역시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영리한 수사일 뿐, 로켓 발사를 거듭하며 뿜어내는 탄소가 도리어 인류의 터전을 더 빠르게 파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화성을 테라포밍(지구화)할 수 있는 막대한 기술과 자본이라면 지구를 몇 번이고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홍근 작사의 동요 '나뭇잎 배'에는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품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라는 구절이 있다. 낮에 냇물 위에 띄우고 놀던 나뭇잎 배 하나가 포근한 어머니의 품에서도 아른거린다는 이야기다. 화려한 레고 블록이 아닌 숲속에 지천으로 널린 자연 그대로의 잎사귀를 소중한 인연으로 여겼던 그 동심을 보며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곱씹게 된다.
어쩌면 자연 안에서 인간을 견제할 천적이 사라지고 절대적인 권위마저 무색해진 근현대 문명은 제동 장치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와 같다. 그 끝이 파국일지 새로운 희망일지는 알 수 없으나 거대한 위기가 목전에 닥쳐온 것만은 분명하다.
환경 보호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던 유럽은 사실 산업혁명 이후 환경 파괴에 가장 앞장서 온 장본인들이다. 최근 20여 년 사이 환경보호를 열렬히 외치더니, 기록적인 폭염이 닥치자 사치품이라 백안시하던 에어컨을 차지하려 마트에서 쟁탈전을 벌인다. 한편 네팔 대통령은 기후 재난 앞에서 단순한 구호 지원이 아니라, 원인 제공 국가들을 향해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어 숨가쁘게 달려온 대한민국 역시 누적 탄소 배출량 세계 9위에 올라 있다. 물론 압도적 배출량을 자랑하는 국가는 30%를 차지하는 중국과 13%의 미국, 6%의 인도 등이다. 그러나 단순히 탄소를 많이 뿜어낸 국가에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 또한 단편적인 시각일 수 있다. 전 세계 기업들이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그곳에서 값싸게 생산한 물건들을 소비하며 막대한 이윤과 편의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특정 국가만의 문제이겠는가. 지구와 나,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인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비명에 스러져 간 네팔의 얼굴 모르는 형제자매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