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10여일 앞두고 찾아간 서울 가락시장과 남대문시장에 '대목'의 활기는 없었다. 상인들은 경기가 엉망이라며 한숨을 쉬었고, 시민들은 연말정산 여파로 지갑이 얇아졌다며 울상이었다.
지난 7일 오후 정오쯤 송파구 가락시장 내 청과물시장. 설을 불과 열흘 앞둔 상점에는 선물용 사과와 배, 감 상자들이 어른 키높이보다 더 높게 기둥처럼 줄줄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쌓여있는 과일들 사이로 손님들의 발걸음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인적이 드물기에 손님 한 두 무리만 지나가도 상인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현장에서 사정을 들으니 상인들은 손님이 줄었다며 울상이었다.
"대목은커녕 손님이 아예 없어요." 과일 상점을 운영하는 이모씨(44)는 "이런 때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지금쯤이면 선물용으로라도 과일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올해는 재고가 많이 쌓였다는 것.
차례상에 올라갈 과일들의 가격도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한 상인은 "최고품 보은 사과가 9개 들이에 3만원 밖에 안 된다"며 "지난해에는 같은 상품으로 4만5000원까지 나갔었다"고 했다. 청과물시장의 다른 상인들도 지난해 구정에 비하면 시세가 많이 낮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손님이 없다'거나 '값이 싸다'는 상인들의 외침은 엄살이 아니었다. 서울청과에 따르면 사과 시세는 지난해 동기 대비 50%이상 떨어졌다. 지난해 사과 5kg들이 한 상자가 3만원대 중후반이었다면 지금은 2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금주에 본격적인 설 대목이 시작된다고 해도 시세는 지난해보다 20~30%정도는 낮은 수준일 것으로 예상됐다.
과일값 하락의 원인은 수요 위축 때문이란 견해가 현지에선 우세했다. 서울청과 관계자는 "시세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소비"라고 강조했다. 농사가 잘 돼서, 품질이 좋지 않아 시세가 낮은 게 아니라 애초에 소비자들이 물건을 찾지 않기에 과일 값이 계속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더욱이 과일은 경기에 민감한 품목이다. 과일은 그나마 명절 때 정해진 수요가 있는 편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과일을 후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면 과일을 찾는 손길도 뚝 끊긴다.
축산시장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28년 전 시장 개장 때부터 자리를 지켰다는 오모씨(64)는 "원래 지금쯤이면 여기에 차를 몰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북적여야 하는데 올해는 꼭 평일 같이 손님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축산물 가격은 설 대목과 구제역 여파로 평소보다 높게 형성돼 있었다. 오씨는 "구제역 때문에 하루 사이에 소 한 마리에 100만원이 올랐다는 소리도 있다"며 "지금 한우 시세는 1kg 당 약 5000원이 올랐다"고 했다.
또 다른 축산시장 상인 이모씨(52)는 "구제역 여파도 있지만 출소량 자체가 적기 때문에 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손님들이 줄어드니까 회사 측에서도 얼마나 가공해서 출소해야 할 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가락시장을 찾은 소비자들은 경기 부진 등의 여파로 제수용품에 들일 비용을 줄일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차례상에 올릴 배를 고르던 장모씨(46·여)는 "운영 중인 가게에 손님이 끊겼다"며 "수입이 줄었으니 나도 나가는 돈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개편된 연말정산 때문에 실질적으로 월급이 깎여 설 준비 비용까지 줄였다는 반응도 있었다. 주부 권모씨(50·여)는 "2월에 남편이 연말정산으로 50만원 이상 더 내게 생겼다"며 "올해에는 조카들한테 줄 세뱃돈도 줄이기로 남편과 합의했다"고 전했다.
시장 사무실에 근무하는 성모씨(34)도 "주변 직장인 친구들이 다들 제수용품 구입비를 지난해 20만~30만원에서 올해 10만원대로 줄이겠다고 하더라"라며 "보너스는커녕 월급이 깎인 판에 명절 준비나 제대로 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날 남대문시장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판매하는 일부 매장을 제외하곤 상인들의 표정은 대부분 어두웠다.
식료품상점을 운영하는 고모씨(52)는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죄다 아이쇼핑만 할 뿐 물건을 사는 사람은 적다"며 "경기도 안 좋고 야채값이 많이 올라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 상인들은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코주부 안경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분장한 한 남성은 "3층에 올라가시면 각종 그릇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라며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시장 곳곳에는 다양한 홍보 팻말이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상가 내부는 한산했다. 북적거리는 거리와 대조되며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한복점을 운영하는 김모씨(56·여)는 "과거엔 혼수 마련을 위해 남대문을 많이 찾았지만 요즘은 아이들 옷을 맞추러 오는 정도다"라며 "설을 앞뒀으니 아이들 색동옷이라도 많이 팔리길 바랄 뿐"이라고 체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