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8월 마지막 주 토요일(29일). 오후 7시30분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교대방면) 10-2 플랫폼에서 사람이 죽었다. 조모씨(29·사고당시)는 전동차 쪽 스크린도어 20~30㎝가량의 틈에서 작업을 하다가 시속 80㎞ 이상으로 달려온 전동차와 부딪혀 끼인 채 20여m를 끌려가다 사망했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고, 강남역을 찾은 수많은 인파가 죽음을 목격했다.
사고 발생 5개월여가 흘렀지만 수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다만 경찰은 사건을 개인과실로 마무리하는 선에서 검찰로 송치할 것으로 보인다. 12일 서울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서울메트로의 스크린도어 유지·관리 외주업체 유진메트로컴을 상대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수사했지만, 적용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작업자에게도 책임소지가 없다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찰 "개인과실로 마무리될 듯"…아버지 "내가 실수했다"=사고 직후 책임 논란이 불거졌다. '2인1조' 정비, 지하철 운영시간엔 스크린도어 안쪽 작업 금지 등의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았고, 강남역이 전동차에 수리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는지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30일 만난 조씨의 아버지 조영배씨(69)도 답답했지만 말없이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고 당시의 악몽을 담담하게 꺼내놓다가도 이내 눈시울이 불거지길 여러 차례였다.
그러나 '아들의 개인과실로 마무리될 것 같다'는 경찰 내 분위기를 전하자 아버지는 참지 못했다. 이 같은 결과에 스스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조씨는 "내가 실수한 것 같다. 돈 받고 아들의 죽음을 개인과실로 인정한 아버지가 됐다"며 눈물을 보였다. "소송을 해서라도 반드시 유진과 서울메트로의 책임을 묻고 싶다"고 흐느꼈다.
◇찢긴 아들에 주저앉은 부모, '손도장 찍으라' 따라다닌 회사=조씨는 사고 사흘 후인 9월 1일 유진메트로컴으로부터 4억원을 받는 내용의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당시에는 아들의 '목숨값'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하루 전인 8월 31일 사고 후 처음으로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찢긴 시신의 봉합에 꼬박 이틀이 걸렸기 때문이다. 조씨는 주저앉았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조씨는 "아들의 시신을 봤을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눈물만 났다. 지금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떠올렸다. 조씨에 따르면, 이러한 와중에 유진메트로컴 관계자들은 유가족들을 쫓아다니며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장례를 치를 것 아니냐'고 설득했다. 회사 한 임원은 "보험금과 위로금 등으로 4억원을 줄 것"이란 말도 보탰다.
'아들을 서둘러 냉동실에서 빼내, 어떻게든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에 조씨는 지장을 찍었다. 보험금 또는 유진 측에서 주는 위로금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사본을 요구하는 것도 잊었다. 장례를 치른 뒤 경찰과 고용노동부 조사가 시작되면서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 한발 늦었다. 조씨가 지장을 찍은 서류는 사고 관련 '합의서', 유진메트로컴에 책임을 묻지 않겠단 내용의 '불처벌의사확인서' 및 '탄원서'였다. 어머니도 "남편이 허락했다"는 설득에 마찬가지로 지장을 찍었다. 회사로부터는 4억원의 영수증만 받았다.
조씨는 지장을 찍은 서류가 더 있다는 걸 경찰과의 통화에서 알게됐다. 이후 경찰과 조씨, 회사측이 '3자대면'을 했지만, 유진메트로컴 측은 "조씨에게 사본을 가져가라고 얘기했었다"며 정당한 합의임을 강조했다. 유진메트로컴측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돈이 오고 간 만큼 합의가 성립된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미 합의금을 받은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의도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돈 다 내놓겠다…아들 죽음 헛되지 않도록"=사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서울메트로와 유진메트로컴을 오가고, 강남역에서 1인 시위까지 벌였던 조씨의 노력은 사고 발생 초기 찍었던 손도장으로 인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조씨는 "내가 바보가 아닌가. 아들의 '목숨값'을 받았다고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며 낙담했다.
조씨에게 남은 건 본인의 '실수'를 되돌려서라도 아들의 죽음에 책임있는 자들의 사과를 받고, 공정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상황은 녹록치 않다. 아버지의 지장으로 이미 아들은 △회사의 지시도 없이 독자적 판단으로 작업했고 △도착 후 강남역에 보고조차 않았으며 △규정을 어기고 홀로 작업해 죽음을 자초한 사람이 돼 버렸다.
조씨는 "경찰과 고용노동부에서도 '도장 찍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사건을 모두 마무리한다는 명목인 것을 알았다면 찍지 않았을 것"이라며 "돈도 그대로 있고 다시 돌려주겠다. 제발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 수사가 '개인과실'로 최종 마무리될 경우, 통장 잔고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4억원을 반납하고 소송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유진과 서울메트로의 책임을 물을 예정이다.
"아들이 떠난 강남역 스크린도어에서 저도 죽고 싶습니다. 사고만 아니면 15년 사귄 예비신부와 결혼 준비에 정신없이 바빴을 아이입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시켜 죽게 해놓고 돈으로 끝내려는 유진과 서울메트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경찰과 고용노동부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결연했지만, 그의 앞에 놓인 벽은 높아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