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는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 독립투쟁 위원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이미 남과 북 양측에는 단독 정권이 들어설 준비가 진행되고 있어 분단은 기정사실화 된 상태였다. 당시 이승만은 민족주의 측면에서 남측만의 단독 선거를 주장했고 북측의 김일성은 공산주의 체제에 맞춰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남측과 북측 모두와 대립 관계에 있던 김구는 1948년 2월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성명에는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도선도 철폐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후 김구 세력은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내고 유엔한국위원단에 남북협상방안을 제시하며 북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구는 끝내 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했고 1949년 6월26일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