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인공지능이 판결문을 쓴다면

문영재 기자
2016.03.23 13:17

[the L]

세기의 대결로 불리며 이목을 끌었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대국. 구글 딥마인드의 이벤트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알파고 쇼크' 파장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 모습이다.

최근 변호사 개업을 한 선배와 만난 자리에서도 인공지능은 단연 화제였다. 그에게 농담 삼아 물었다. "법정에 인공지능을 세우면 판결에 대한 이러저런 뒷말도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난해한 용어와 지나치게 복잡한 판결문, 공소장 등도 한결 간결해질 텐데요."

가볍게 우스갯소리로 넘길 줄 알았는데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아니 심각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낯빛도 어두워졌다.

그의 반응은 법조계의 신뢰도 추락과 무관치 않다. '널뛰기 판결'이나 '전관예우' 논란 등은 사법 불신을 낳는 요인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머니투데이 더엘(the L)이 올해 초 ‘법원신뢰도 대국민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10명 가운데 7명꼴로 재판결과가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지난해 형사정책연구원 설문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절반가량은 검찰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의 '쉬운 판결문 쓰기'는 또 어떤가? 국민과의 소통을 내세웠지만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의 1심 판결문이나 최태원 SK회장 형제의 1심 판결문 분량은 500쪽 가까이 됐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일본식 표현도 잔존하고, 관행에 갇혀 과거에 썼던 표현들을 답습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려운 용어나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순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리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송사를 겪었던 국민 중 일부는 차라리 사람보다 인공지능에 일을 맡기는 게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주어진 값대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 놓고 보면 인공지능이 경쟁력이 있을 수도 있다. 알파고가 이 9단의 수를 꿰고 곧바로 반응했듯이. 멀리 해외에선 벌써 방대한 법률 자료를 분석하는 인공지능이 판사를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옥스퍼드대 마이클 오스본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판사 직군이 사라질 가능성을 40%로 봤다.

당장 수년 안에 인공지능이 판사나 검사, 변호사를 대체하진 않겠지만, 빛의 속도만큼이나 빨라진 기술혁신으로 사람의 업무 영역을 조금씩 잠식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은 유효하다. 보조영역으로 분류되지만 미국 법률 자문회사 로스인텔리전스는 1초에 80조번 연산을 하고 책 100만권 분량의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IBM인공지능 '왓슨'을 기반으로 대화형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엘리트 직군인 법조 분야가 사람만의 영역이라고 자신하며 기계적인 업무만 할 때는 아니다. 이 9단이 대국 전 승리를 장담하다 패한 것처럼 먼 훗날 진짜 기계에 자리를 내어주는 우스운 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조인들도 인간만의 차별성을 찾는데 예외가 돼선 안 된다. 인공지능의 기술발전 초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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