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년 전 오늘…'일본형' 한국 사법제도의 등장

이미영 기자
2016.10.13 05:57

[역사 속 오늘] 1910년 나라 뺏기기 전 사법권 먼저 빼앗겨…법정에서 일본어로 재판하기도

대법원 전경. /사진=뉴스1

우리나라 변호사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변호사의 필요성이 등장한 건 1894∼1895년 갑오·을미개혁으로 조선의 법제도가 바뀌면서다.

관아에서 임명된 수령이 독자적으로 재판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재판소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제도로 변화했다. 오늘날 법원 격인 재판소와 범죄자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검찰제도가 최초로 탄생한 것이다.

제도가 바뀌다보니 전문인력의 수요도 생겼다. 처음부터 변호사 제도가 도입되진 않았다. 1895년부터 1905년까지는 소송인의 재판과정에 도움을 주는 대리인 제도가 있었다. 행정절차와 변호 모두를 맡을 수 있었지만 특별한 자격요건은 두지 않았다.

변호사자격을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1905년. '광무 변호사법'에 따르면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 당사자는 변호인을 통해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이때 사법제도는 평리원과 한성재판소로 구성되는 2심제도였다.

이 법에 따르면 법관전고에 합격한 자와 시험에 급제한 자, 변호사시험에 급제한자, 변호사 시험위원을 역임한자, 평리원 및 한성재판소에서 만 2년 이상 계속 근무한 자 중 법부대신의 인가를 얻은 사람이어야 했다. 변호사 시험이 아직 시행 전이던 이때 이 조건을 만족한 홍재기·이면우·정명섭씨 3명이 국내 변호사 1·2·3호로 등록하게 됐다.

1907년 6월에는 법부 참여관실에서 변호사시험이 실시됐다. 응시자는 80여명인데 많은 응시생들이 보성전문학교 등의 졸업생이었다. 시험은 4일간 실시됐는데 시험과목은 민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상법, 행정법, 국제공법이었다. 시험제도가 생기고 난 후에는 시험공부를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 광고도 등장했다.

첫 시험에서는 이항종·장택환·허 헌·옥동규·계명기·이종성씨 등 합격자 6명이 나왔다. 2회 변호사 시험까지 20명의 변호사가 배출됐다.

우리나라의 근대 사법제도는 1909년 일본의 내정간섭이 시작되면서 '일본화' 되기 시작했다. 1908년 8월 심급제도가 일본의 사법제도를 본떠 경성지방재판소, 경성공소원, 대심원으로 이뤄진 3심제로 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제도가 바뀌었으니 자격증제도도 변화가 필요했다. 1909년 4월 기존의 변호사법이 폐지되고 '사법시험규칙'과 '변호사명부등록규칙'이 새로 생긴 연원이다. 순종3년에 만들어져 '융희변호사법'라고 불리기도 했다. 107년 전 오늘(1909년 10월13일) 대한제국의 1회 사법시험이 치러진 배경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법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당시 일본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일본 변호사들이 재한 일본변호사로 활동했는데, 이 법이 시행되면서 이들은 한국 변호사와 통합돼 동일한 자격을 부여받게 됐다. 그해 11월부터는 일본 변호사와 재판할 경우 일본어로 재판을 진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1910년 한일병합 이전 이미 대한제국은 사법권을 일본에 넘겨준 셈이다.

이 제도는 1년 남짓밖에 시행되지 못했다. 1910년부터는 일본의 통제 아래 사법제도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변호사 시험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 도입된 사법제도지만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대 사법제도가 채 정착하기도 전 일본 사법제도가 이 역할을 대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광복 후에도 일본과 유사한 사법제도를 운영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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