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외교·베트남 종전'과 '워터게이트'
미국 37번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44년 전 오늘(1972년 11월 7일) 재임에 성공했지만 워터게이트(Watergate scandal) 사건으로 2년 뒤(1974년 8월 9일)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는 임기를 마치지 못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변호사 출신 해군 소령으로 종전 후 정계에 입문한 닉슨은 상·하원에서 반공주의자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 39살의 나이로 부통령까지 올랐다. 미국 34번째 대통령인 아이젠하워(42·43대)와 부통령을 연임했다.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춘 닉슨은 1960년 존F.케네디에 패배했지만 8년 뒤 재기에 성공해 46대 대통령에 올라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그는 특히 냉전시대 '대화의 아이콘(상징)'으로 부상하며 미국을 넘어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69년 베트남전 철수를 골자로 한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방위도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는 정책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자국민과 전쟁에 지친 세계인들의 지지까지 얻었다. 이때 한반도 주한미군 6만여명 중 2만여명이 철수했다.
닉슨은 탁구대회를 계기로 한 '핑퐁외교'를 필두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론 처음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과 만나 국교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도 '레임덕'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72년 11월 대선을 앞둔 6월 그의 지시로 야당이던 민주당 선거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주당 선거본부가 있던 호텔명이 '워터게이트'였다.
사건 초기 선거캠프를 노린 단순범죄로 시작됐지만 닉슨이 재임된 1973년 이후 재판과 언론 등을 통해 백악관이 개입한 정황 등이 서서히 드러나게 됐다. 그 사이 닉슨은 미국 50개 주 중 49개의 지지를 받으며 재선했다. 워터게이트가 불거졌을 당시 '별것 아닌' 사건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사건은 점점 커졌다.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범인이 CIA요원이었고 닉슨의 측근들이 연루됐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앞서 백악관은 워터게이트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각종 의혹이 제기되자 비서진 등이 '알아서 저지른 일'이라고 꼬리 자르기까지 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선 이후 닉슨은 워터게이트에서 시작된 각종 의혹을 해명하느라 국정에 손을 놓다시피 했다. 그는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며 사건을 무마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사건을 덮으려는 거짓말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다.
1974년 3월 닉슨의 측근 7명이 검찰에 기소됐고 이어 5월 상원의원이 주최하는 워터게이트 청문회도 열렸다. 당시 닉슨이 수석보좌관과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연방수사국은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는 등의 내용이 공개돼 파문이 커졌다.
워터게이트뿐 아니라 여러 도청 활동과 문서 위조, 매수 등의 부정행위와 연관돼 있음이 밝혀졌다. 하원에선 곧바로(1974년 7월) 사법방해와 권력남용, 의회모욕 혐의로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탄핵이 확실시되자 닉슨은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1974년 8월 8일 오후 닉슨은 1분여간의 퇴임 발표 후 다음 날 사퇴했다. 퇴임사는 당시 1억여명이 시청해 미국 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뛰어난 실력으로 대통령에까지 올랐지만 결국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겨졌다. 대통령을 이어받은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그해 9월 닉슨을 사면해 직접적인 처벌은 면했다. 포드는 재선에 실패했다.
닉슨은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해 뉴욕 등에서 거주하며 대통령들에게 조언을 하는 등 대외활동을 벌였지만 시민들의 눈총을 샀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내가)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사소한 것들"이라며 "그밖에 경제, 외교 활동 등 큰 것들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