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택배 지상출입 허용했지만…"괜히 죄 짓는 기분, 지하로 배달"

오진영 기자, 김주현 기자
2021.06.02 06:00

"지상으로 다녀도 어차피 저상차량으로 안 바꾸면 배송 못 해요."

1일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저상차량에 타고 있던 택배기사 정모씨(가명·41)는 지하주차장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 아파트는 지난 14일부터 한시적으로 택배차량의 지상출입을 허용했지만 정씨는 계속 저상차량를 이용한다. 지상으로 다니면 시속 10㎞ 내외 저속으로 운행해야 하기 때문에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는 편이 시간 절약에 도움이 돼서다.

이날 기자가 찾아간 지상출입을 허용한 송파구 거여동의 한 '공원형 아파트'에서는 대다수 택배기사가 취지에 공감한다면서도 효과에는 의문이 있다고 답했다. 다른 아파트도 배송해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저상차량으로 교체해야 해 큰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개조비용 지원이나 거점배송 등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상출입하니 되레 부담…"어차피 저상차량 모는데"
1일 택배차량(탑차)의 지상출입을 허용한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 탑차가 주차돼 있다. /사진 = 오진영 기자

1200세대 규모의 이 아파트는 지난해 5월 완공됐다. 입주 당시 지상에 차량이 다니지 않는 공원형 아파트로 알려졌고 지하주차장 높이가 낮아 택배차량이 지하로 다닐 수 없다. 지난 4월1일부터 택배차량의 지상출입을 금지하면서 '택배 대란'이 불거졌던 고덕동의 한 아파트보다 규모는 작지만 조건이 비슷하다.

이 아파트를 전담하는 일부 기사들은 지하주차장 입구까지만 배송한 뒤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거나 손수레를 끄는 방식을 이용했다. 아파트가 공식적으로 지상출입을 금지한 적은 없지만 일부 기사들이 입주민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가 지난 14일부터 조건부로 지상출입을 허용한 다음에도 저상차량으로 배송 중이다.

이날 단지 내 기사들은 대부분 저상차량을 이용했다. 일반 차량을 몰던 기사도 "이달 안에 양쪽에 문이 달린 저상차량으로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들은 지상출입 허용이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지상출입이 금지된 다른 아파트도 배송해야 하는데다 시속 10㎞ 내외 운행속도 제한이 배송시간을 되레 늘린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택배기사는 "지상출입이 언제 다시 막힐지도 모르고 다른 아파트 지하주차장도 출입해야 해 사비를 들여 저상차량으로 바꿨다"며 "지상으로 다니면 아이들이 어디서 뛰어나올지도 모르고 사고라도 나면 책임을 기사가 다 져야 한다고 하는데 괜히 죄짓는 기분이고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입주민들도 지상출입 허용은 택배대란의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입주 초기부터 이 아파트에 살았다는 입주민 김모씨(57)는 "기사님들이 고생하시는데 웬만하면 편의를 봐드리고 싶다"면서도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이나 아이들도 단지 내에 많고 지상에 제대로 된 차도도 없어 (지상출입하면) 입주민과 기사 모두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했다.

고덕동 '택배대란'아파트는 정상 배송 중…"입주민 거부하면 논의 자체 못해"
14일 택배 차량(탑차)의 지상출입을 금지한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앞에 택배 물품이 쌓여 있다. / 사진 = 오진영 기자

택배대란이 불거진 강동구 고덕동의 아파트는 현재 20여명의 택배기사들이 대부분 정상 배송 중이다. 저상차량을 사용해 배송 중인 인근공원형 아파트들도 배송 문제로 갈등은 없었다. 일부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현실적인 효과가 크지 않은 지상출입 대신 거점배송·개조비용 지원 등 다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덕동 아파트의 입주민 윤모씨(52)는 "모든 기사들이 '정말 힘드니 도저히 배송을 못하겠다'고 말하면 모르겠지만 지금 대부분 정상 배송 중인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며 "입대의 측도 기사들과 협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고 했다. 또 "기사들이 저상차량 개조비용을 지원해 달라거나 하면 적극 찬성할 것"이라고 했다.

택배노조와 택배사, 정부는 지난달부터 '지상 공원화 아파트 배송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 달이 넘도록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협의체에서 방안이 도출되더라도 개별 아파트가 거부하면 강제할 수는 없다. 결국 입주민들이 동의하지 않는 방식의 대안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전국에 공원형 아파트가 수백개가 넘는데 협의체나 택배사에서 일일이 '지상출입을 허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며 "입주민들이 지상출입을 거부한다고 해 무조건적으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현실적인 대안을 찾지 않으면 '택배 대란' 해결이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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