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피의자'가 될 수 있는 시대다. 현행법상 수사기관에 고소·고발이 접수되는 순간 피고소·고발인은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사 결과 범죄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불기소' 되더라도 피고소·고발인들은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일각에서는 고소고발을 '전건(全件) 입건'하는 현행 제도를 범죄 혐의 유무나 경중에 따라 '선별(選別) 입건'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고소·고발인이 겪는 절차적 고통이 극심하고 사건 처리를 하는 수사기관 부담이 과도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적절한 통제 장치를 갖춘 선별입건법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사인력을 대폭 늘려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별입건법제도 논의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박형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고소·고발 남용은 무고한 피해자를 형사 피의자로 편입시킨다"며 "불기소 처분을 받더라도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형사피의자로 편입되는 건 인권 침해"라고 했다.
당시 김창룡 경찰청장도 "고소·고발 자체로 피의자가 되고 이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있다"며 "제도개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학계에서도 고소·고발 사건에서 선별입건법제를 고려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윤동호 국민대 법과대학 교수는 지난해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전건입건법제는 '고소·고발부터 하고 보자'는 법문화와 고소·고발 남발, 민사사건의 형사화 경향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대검찰청이 수사 개시 필요성이 없는 고소·고발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각하 대상 고소·고발 사건의 신속처리에 관한 지침'을 시행했다.
대검에 따르면 2016년 68만5301건이었던 고소·고발 사건은 지난해 74만3290건까지 늘어났다. 해마다 평균적으로 약 20% 정도가 각하 처분되고 그 비율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별입건법제가 유일한 해답은 아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사건을 선별입건하고 있지만 기준이 모호하다며 중립성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는 동시에 선별입건법제에 대한 적절한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모든 사건을 입건해 수사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피해를 회복할 방법이 없다"며 "피해자들은 국가기관을 믿지 못하고 자력갱생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김혜경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형사 절차 진입권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문제는 형사 절차를 악용하는 것에 대한 제재인데, 이는 사전차단이 아닌 무고죄나 행정제재 부과, 형사절차비용부담제 등 사후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선별입건 제도가 우리나라 형사법제에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위원은 "최소한 공수처처럼 사건을 분석해 의견서를 작성하고 처장이 최종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꼬집었다.
이어 "선별입건으로 피의자 인권을 중시하다 피해자 인권이 무시당하는 정의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며 "차라리 고소·고발에 의식 변화를 주거나 수사인력을 두 배로 늘리는 게 합리적 해결책"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