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권리 위에 사법 권위…'법원 먹통' 예고된 사고

심재현 기자
2023.03.07 04:00

[MT리포트-'먹통 느림보' 사법서비스]①20년째 '땜질식 처방'만 하는 법원 전산서비스

[편집자주] 법원 전산망 전체가 마비되면서 재판 일부가 연기되고 전자 소송, 사건 검색 등 대국민 서비스가 전면 중단되는 초유 사태가 발생했다. 법조계에서는 법원의 안일한 전산행정과 권위적인 서비스 인식이 빚어낸, 예고된 사고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법시스템이 잠깐 멈췄다가 재개됐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법원의 행정편의주의를 두고 제기됐던 잠재적 우려가 확인됐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신설된 부산·수원회생법원으로 사건 전산자료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전국 법원 전산망이 마비된 초유의 사태를 두고 법조계 한 인사는 6일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은 시스템 중단이 전산자료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지만 법조계에서는 "막을 수 있는 일을 막지 못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권위주의적인 사법행정이 빚은 예고된 사고라는 지적이다.

법원 전산망은 지난달 28일 오후 8시부터 이달 2일 오후 11시까지, 4일 오전부터 5일 오후 9시까지 두차례 중단됐다. 당초 지난달 28일 오후 8시에 시작, 이달 2일 오전 4시에 끝내려던 자료 이전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자 재판 사무시스템과 전자소송시스템을 재가동하려 했지만 법원 재판 업무가 시작될 때까지 시스템 정상 운영에 실패했다.

이 사태로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에서 일부 민사재판이 미뤄졌다. 전산망을 사용하지 못한 일부 판사들은 종이에 메모하거나 개인 컴퓨터에 기록하면서 재판을 진행했다. 법원 민원실은 종이 서류를 들고 찾아온 사건 당사자들로 붐볐다. 재판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된 변호사들의 의뢰인 면담도 줄줄이 연기됐다.

등기부등본 등을 열람·발급하는 대법원 인터넷 등기소에서도 전자 제출용 등기 사항 증명서 발급, 이의 신청 사건 번호 조회 등 일부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다수의 불편사항이 접수됐다.

이번 사태를 두고 법원 내부에서도 쓴소리가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자료를 미리 옮기거나 예행 연습을 했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 이런 준비를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다른 판사는 "7억7000만건의 방대한 자료를 옮기면 프로그램 오류 가능성 등 다양한 부분을 미리 예상했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섬세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원 전산시스템이 멈춰선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법원이 좀더 자료 이전 작업을 꼼꼼하게 준비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법원 전산시스템은 2007년 6월, 2009년, 2018년 11월, 2022년 5월에도 일시 오류 등으로 먹통이 됐다. "법원의 안일한 사법행정이 이번 사태의 최대 원인"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IT(정보기술) 측면에서 법원 전산시스템이 잦은 오류와 불편 접수에 시달리는 것은 법원이 사법업무 전산화를 통해 재판 사무시스템을 완비한 2002년 이후 20여년 동안 필요에 따라 땜질식 서비스 신설과 처방을 반복하면서 일원화된 체계 없이 제각각 운영되는 탓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법원 내·외부인을 상대로 한 사법 업무 시스템은 110여개에 달하는 서비스로 구동된다.

대법원이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스마트 법원 4.0'으로 불리는 '차세대 전자소송시스템 구축 사업'을 내년 상반기 선보일 계획이지만 문제는 차세대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이번 사태만큼은 아니겠지만 오류 등으로 현재 시스템에 문제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해진 날짜까지 반드시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소송에선 전자소송사이트의 오류 등으로 중요한 서류가 하루만 늦게 접수돼도 사건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사이트의 주된 이용자는 법무법인·법률사무소의 직원과 변호사, 기업 법무팀 직원들이지만 최근에는 '나홀로 소송'을 하는 일반인도 적잖다. 사법부의 땜질 처방과 뒷북 개선에 국민이 볼모로 잡힌 셈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동안 쌓였던 법원 전산시스템에 대한 불편·불만도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대법원 등기소 사이트에서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할 때 MS(마이크로소프트)에서도 지난해 지원을 중단한 구식 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로만 가능하다는 점이 대표적인 불편 사례다. 법원이 선보인 스마트폰용 앱 '대한민국 법원'을 두고도 제대로 구동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이어진다.

법조계 한 인사는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게 꼭 비리 사건 같은 대형 이벤트 때문만은 아니다"라며 "사법부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려면 권위주의적이고 공급자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법서비스의 수요자인 국민 중심의 관점에서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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