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의 어머니는 지난해 1월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았다. 그해 2월 혈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원은 혈소판과 전혈을 지정헌혈로 구해오라고 했다. A씨는 지인 40명에게 연락해 겨우 피를 구했지만 전혈만 받고 혈소판이 없어 다시 지정헌혈자를 구해야 했다. 헌혈자에게 감사 표시로 5000원~1만원 커피 쿠폰을 보내니 어느덧 10만원이나 넘게 썼다.
A씨는 "지정헌혈을 요청하며 구하러 다닐 때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건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라며 "백혈병 투병으로 심리적·금전적인 어려움을 겪는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지정헌혈을 찾으러 다닐 때 심리적인 괴로움과 그 이후 사례로 인한 금전적인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혈액 절벽의 가장 큰 피해자는 혈액암 환자와 그 가족이다. 혈액암 투병 중인 환자는 주로 '혈소판'이라는 특정 성분의 혈액을 수혈받다. 혈소판을 구하기 위해 환자가 직접 수혈자를 지정하는 '지정헌혈'이 4년간 7배나 증가했다. 병원에서 일러준 기한 내 헌혈자를 찾지 못하면 환자는 사망할 수도 있다. 심리적 고통에 허덕이는 환자와 그 가족은 지금도 인터넷과 SNS에서 "지정헌혈을 구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남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헌혈 현황에 따르면, 지정헌혈량은 2018년 1만9344유닛(Unit)에서 2021년 14만2355유닛으로 4년간 7.3배 늘었다. 같은 기간 일반헌혈량은 285만7115유닛에서 246만279유닛으로 해마다 꾸준하게 감소했다.
지정헌혈이란 의료기관이 환자나 보호자에게 직접 수술에 필요한 혈액을 구해오라고 요청해 지정된 지원자에게서 헌혈을 받는 것이다. 혈액암 환자는 항암치료와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는데 이때 혈소판 수치가 떨어져 심각한 출혈 위험을 겪는다. 혈소판 수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환자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혈소판제제는 채혈하는 데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데다가 유효기간도 5일밖에 안 돼 많은 양을 구비하기가 힘들다. 보유한 혈소판제제가 부족하니 병원이 환자와 가족에게 직접 구해오라고 시키는 것이다. 일부 병원은 자신들이 보유한 혈액량을 아끼기 위해 환자에게 지정헌혈을 권장하기도 한다.
백혈병 환자의 지정헌혈 관행은 2007년 '혈소판 사전예약제'가 도입된 이후 한동안 사라졌었다. 당시 환자 단체가 "백혈병 환자가 직접 피를 구하지 않게 해 달라"고 14일간 농성한 끝에 이룬 성과였다. 그러나 15년 전 사라졌던 지정헌혈 관행이 최근 헌혈량 감소로 최근 부활하게 됐다.
혈소판 성분헌혈 현황에 따르면, 2018년 지정헌혈로 공급된 혈소판제제는 4437유닛이다. 전체 혈소판 성분헌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정헌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늘더니 2021년에는 3만711유닛에 달했다. 그해 공급된 혈소판 성분 헌혈(23만1739유닛)의 11.7%가 환자가 직접 뛰어다니며 구한 지정헌혈자에게서 나왔다.
지난해 국정감사에 출석해 지정헌혈의 어려움을 토로했던 백혈병 환자 장연호(21) 씨는 "투병할 당시에도 22살 소방관을 꿈꾸던 환자 한 분이 혈소판 수혈을 기다리다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적이 있었다"며 "또한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으면서 죽음과 싸우는 17살 소년이 저에게까지 연락해 지정헌혈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장 씨는 "(조혈모세포)이식 치료를 받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계속 구토가 나와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며 "매일마다 다른 부작용에 시달리며 휴대폰을 잠깐 보는 것도 어려웠었는데 이런 환자에게 '살고 싶으면 네가 가서 피를 구해 와' 하는 꼴이라니, 참 잔인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혈소판 지정헌혈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성분채혈 혈소판 채혈장비 신규 설치 △헌혈의집·카페 운영시간 연장 △혈소판 성분헌혈 참여 권유 등이 있다.
특히 채혈장비 확보가 중요하게 거론된다. 혈소판 성분헌혈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채혈장비가 필요하다. 이를 갖추지 못하거나 장비가 부족해 수요만큼 채혈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지난해 기준 전국 170개 헌혈의집·헌혈카페에서 성분채혈 혈소판 채혈장비가 설치된 곳은 141개다. 29개 기관에서는 혈소판을 채혈할 장비를 아직도 갖추지 못했다.
한국백혈병환우회는 "채혈장비가 설치돼 있지 않은 29개 헌혈의집·헌혈카페에 채혈장비를 1대씩 29대를 설치하고, 채혈장비 1대당 하루 혈소판 성분헌혈을 3건만 해도 혈소판 지정헌혈은 필요하지 않다"며 "이는 정부의 재정 투입으로 신속한 해결이 가능한 방안이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방안은 혈소판 함량 규격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현재 혈소판제제 공급 기준은 한 단위당 3x10¹¹개의 혈소판을 함유해야 한다. 해당 기준에 살짝 미치지 못한 혈소판제제라도 응급 수술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이 기준을 채우기 위해 채혈 시간이 과도하게 길어지거나 연장돼 헌혈자 부담이 가중된다는 단점도 있다.
김태엽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 회장(건국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 외국처럼 성분채혈 혈소판이 다양한 함유량 규격으로 공급된다면 혈소판 공급도 더 원활해지고 적응증에 따른 적정 선택 사용도 가능하다"며 "일부에서는 이런 제품을 '함량 미달'이나 '불량품'으로 간주해 터부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60% 혈소판 함량도 정말 급할 때는 사용할 수 있다. 수술 시 당장 피가 없을 때는 그런 제품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