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음주 뺑소니...6000톤 화물선, 광안대교 들이받았다[뉴스속오늘]

이재윤 기자
2026.02.28 06:03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2019년 2월 28일 5998톤 짜리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호'가 광안대교 교각 하부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사진=뉴스1

'쾅, 와장창.'

2019년 2월 28일 오후 4시 23분.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가 굉음과 함께 요동쳤다. 5998톤 짜리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호'가 광안대교 교각 하부를 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사고는 강풍이나 파도 등 천재지변이 아니었다. 한 선장의 무책임한 운항과 안전불감증이 만든 인재(人災)였다.

혈중 알코올농도 0.086% '면허 취소' 수준…러시아 선장의 무책임한 운항

이날 오후 3시 35분 씨그랜드호는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출항 신고조차 하지 않고 임의로 용호만 부두를 떠났다. 항로를 안내할 도선사도 태우지 않은 상태였다. 씨그랜드호는 지정 항로를 이탈해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려 했다.

오후 3시 47분 광안대교 충돌 약 30분 전에 1차 사고를 냈다. 해상에 정박해 있던 35억원 상당의 요트 2척과 바지선 1척을 연달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요트 선체에 구멍이 뚫리고 승선원 3명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1차 사고 후 도주하듯 운항을 계속하던 씨그랜드호는 관제센터의 긴급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관제센터에선 위험성을 감지하고 즉시 '항로 변경'을 지시했지만, 러시아인 선장 A씨는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부족한 영어 실력 탓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 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이 거대한 쇳덩어리는 광안대교 하층부 도로 철구조물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이 충격으로 교각 하부에 2m 넘는 구멍이 났고, 일부 구조물이 긁혀나갔다.

부산 남구 용호부두를 출항한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호'가 광안대교를 들이받았다. VTS와 씨그랜드호의 교신 내용./그래픽=뉴시스(전진우 기자)

충돌 직후 A선장은 방향을 돌려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해양경찰에 의해 A선장의 도주는 곧바로 제지당했다. 적발 당시 A선장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086%로 측정됐다. 일반 도로 음주운전 측정기준으론 '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수치다.

변명은 궁색했다. A선장은 음주 운항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사고 직후 스트레스를 받아 코냑을 한 잔 마셨다"고 말했다. 사고 직후 요트와 충돌한 사실이 없다고 관제센터에 거짓 보고까지 한 정황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사고로 인한 후폭풍이 꽤 컸다. 사고 당시 광안대교 진입로 일대 교통이 마비됐다. 이후 사고 부위 정밀 안전진단과 보수를 위해 한 달 넘게 광안대교의 차량 통행이 일부 통제됐다. 부산시가 추산한 수리비와 두 달 치 통행료 손실분만 28억 4000만 원에 달했다. 사고 선박회사가 가입한 러시아 보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진행됐다.

"한잔 정도 괜찮겠지"…바다의 '음주운전' 기준 마련 계기

검찰은 선박교통사고 후 도주, 해사안전법 위반 등 주요 혐의를 적용해 선장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2019년 9월 1심 재판부인 부산지방법원은 도주, 음주운항, 일반교통방해 등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 4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선박회사에는 1000만 원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피의자 측이 항소를 포기하며 형은 확정됐다.

관할청인 부산해양수산청은 도선사 없이 임의 출항하는 관행을 막기 위해 1000톤급 이상 대형 선박의 용호만 부두 출입을 전면 금지하고, 강제도선 구역 확대를 추진했다.

부산 영도구 부산해양경찰서에서 광안대교와 충돌사고를 낸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호의 선장 A씨(43)가 구속전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법원으로 이동하고 있다./사진=뉴스1

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해상 운항의 음주 운전 안전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2020년 5월 19일 씨그랜드호 사고를 계기로 처벌을 대폭 강화한 이른바 '바다의 윤창호법(해사안전법 및 선박직원법)'이 시행됐다. 기존에는 혈중알코올농도 0.03% 이상이면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이라는 단일 기준만 있었다. 그러나 개정법은 이를 수치와 횟수에 따라 엄격히 세분화했다.

5톤 이상 선박 운항자가 적발될 경우 △0.03~0.08%는 징역 1년 또는 벌금 1000만원 이하 △0.08~0.20%는 징역 1~2년 또는 벌금 1000~2000만원 △0.20% 이상은 징역 2~5년 또는 벌금 2000~3000만원의 처벌을 받게 됐다. 특히 상습 음주 운항이나 측정 거부가 2회 이상일 경우 최대 징역 5년에 처해진다.

면허 취소 기준도 강화됐다. 과거엔 솜방망이 처분에 그쳤으나, 이제는 첫 적발이라도 수치가 0.08%를 넘기거나 인명피해를 내면 즉각 해기사 면허가 취소된다.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은 바다에서도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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