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전 오늘 서울의 한 아파트 욕조에서 차디차게 식어버린 치과의사 모녀가 발견됐다. 타살 흔적은 선명했으나 수사기관의 뼈아픈 초동 수사 실패로 범인을 특정할 직접 증거는 사라져 버렸다.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던 남편마저 8년간 다섯 차례의 법정 공방 끝에 무죄를 확정받았다. 결국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진범이 누구인지는 영원히 밝힐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1995년 6월 12일 오전 8시 45분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 7층에서 흰 연기가 발생했다. 이를 알아챈 경비원이 119에 신고했고, 소방관들은 10여 분 만에 화재를 진화했다.
소방관들은 불을 진화한 뒤 집 안을 살폈는데 물이 담긴 화장실 욕조에서 30대 여성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이 숨져있는 걸 발견했다. 치과의사였던 30대 여성은 발견 당시 상의가 벗겨져 있었으며 팬티는 무릎 근처까지 내려진 상태였다. 이 여성과 어린 딸 모두 끈으로 목이 졸린 흔적이 발견됐다.
타살이 명백한 상황에 더해 불이 안방 장롱 속 옷가지에서 처음 발화했다는 점도 누군가 방화를 했을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현관문이 잠겨 있는 등 외부로부터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현금과 귀중품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누군가 집을 뒤진 흔적도 없었다.
경찰은 피해자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만한 사람들을 수사 대상에 올렸고, 수사를 진행하며 한 명씩 수사선상에서 제외했다. 숨진 여성에게는 내연남이 있었는데, 그는 사건 발생 시간에 다른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러자 숨진 여성의 남편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수사기관은 남편이 내연남의 존재를 알고 아내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외과의사인 남편은 사건 당일 오전 7시, 자신의 개인 병원 개원식을 위해 집을 나섰다. 그가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결국 이 사건은 모녀의 사망 시각이 '오전 7시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 남편의 유무죄가 완전히 갈리는 상황이었다. 7시 이전이라면 남편이 범인으로 확정되지만, 그 이후라면 남편은 알리바이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정황은 많았다. 아내의 내연 관계뿐만 아니라 평소 두 사람이 시댁 문제와 성격 차이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빚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남편은 수사기관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도 대부분 '거짓' 반응을 보였다.
조사 과정에서 의혹을 더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포착됐다. 남편 소지품에서 쪽지 하나가 발견됐는데, '위험한 독신녀'라는 영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는 주인공이 사람을 죽여 욕조에 유기하고, 증거를 없애려 불을 지르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남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부인했으나, 과거 비디오 대여점 등에서 이 영화를 두 차례나 빌려 본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직접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경찰은 시신 발견 당시 가장 기본적이어야 할 욕조 물의 온도조차 측정하지 않았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물에 손을 넣어본 뒤 "좀 따뜻했다"고 진술한 것이 고작이었다. 사망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놓친 셈이다. 범행 도구 등 증거 수집에도 소홀히 하면서 살인에 이용된 도구를 찾아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남편이 오전 7시 이전에 아내와 딸을 살해했으며 사건 발생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시신을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놓은 욕조에 유기했다고 결론지었다. 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불이 천천히 발생하도록 방화를 위한 사전 작업을 해놓고 나간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도 사실상 직접 증거를 찾는 데 실패했는데, 정황 증거를 들어 같은해 9월26일 남편을 기소했다.
1심에서 남편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1심 재판부는 시반과 시강에 의한 사망 시각 감정 결과 등을 종합해 모녀가 6월11일 오후 11시 30분에서 6월12일 오전 6시 30분 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판단했다.
'시반'은 사망 후 중력에 의해 혈액이 쏠리며 시신 아래쪽에 생기는 자줏빛 얼룩을 뜻한다. 숨진 모녀에게는 시신 이동 시 반대편에도 생기는 '양측성 시반'이 생긴 것으로 추정됐는데 보통 이 현상은 사망 6~8시간 이후 발생한다. 또 피해자 지문을 찍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상당히 굳어 있었던 상태로, 사후 경직 상태인 '시강'이 진행된 것으로 판단됐다. 사후 경직 또한 사망 7~8시간 이후 발생한다.
2심에서는 판결이 180도 뒤집혀 무죄가 선고됐다. 사망 시간 추정과 관련된 각종 증거들이 모두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니 남편이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남아있다는 게 2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간접 증거에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결국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유무죄를 다퉈야 했다. 검찰은 국내 법의학자들의 소견을 근거로 재차 모녀의 사망 시간이 오전 7시 이전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또 검찰은 "남편은 출근한 뒤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불이 서서히 붙는 밀폐된 공간인 장롱 속에 불을 냈다"며 밀폐된 방 안에서 장롱 속 옷가지에 불을 붙이면 밖에서 연기가 발견될 때까지 2시간 이상 걸린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을 증거로 제출했다.
남편 측 김형태 변호사는 스위스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처를 증언대에 세워 모녀가 오전 7시 이후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사망 시간을 추정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직장부분 온도를 측정하는 것인데 경찰 초동 수사 실패로 측정이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추정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시반, 시강으로 사망 시간을 추정하는 건 오차 범위가 넓다"며 "시신이 뜨거운 물에 잠겨있을 경우 강직 현상이 일찍 올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남편 측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발화 시간을 재연한 검찰 측과는 달리 1800만원을 들여 실제 아파트 모형을 만들어놓고 화재 실험을 했다. 발화 5~6분 만에 하얀 연기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8분 후부터 자연 감소되었다. 화재는 남편이 출근한 이후 발생했다는 얘기다.
파기환송심은 다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의 재상고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하며 최종적으로 남편은 8년 동안 5번의 재판을 거치면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김 변호사는 "추정만을 가지고 섣부르게 살인범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건 처음부터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며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있으면 칼같이 무죄를 선고하라는 게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라고 했다.
앞으로 강력한 증거가 나오더라도 2010년 공소시효가 만료돼 기소가 어려운 상황이며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다른 증거가 나오더라도 유죄 확정 판결에 가능한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결국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은 초동 수사의 현장 보존 실패와 사망 시각 추정의 한계로 인해 영구 미제로 남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