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네모 안에만 던지라고.'
야구장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문구다. 쏟아지는 볼넷에 팬들은 투수들을 향해 이렇게들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올 시즌 KBO리그는 어느 때보다 많은 볼넷이 쏟아지고 있다.
720경기 중 162경기를 치른 현재 볼넷은 1316개가 나왔다. 경기당 볼넷은 8.12개에 달한다. 최근 5시즌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10개팀 체제로 치러진 201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7.12개에 비해 평균적으로 경기당 하나의 볼넷이 더 나오고 있는 셈이다. 많은 볼넷은 '스피드업'을 추구하는 KBO리그의 경기 시간을 장기화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프로야구 구단 A 감독은 "1아웃을 잡기가 그렇게 힘든가보다"라며 "지금 모든 팀 선수들이 볼넷, 볼넷이다. 야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볼넷 안 내주는 투수가 야구를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씁쓸함을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많은 볼넷이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로는 피치클락 단축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2025년 후반기부터 정식 도입된 피치클락은 올 시즌을 앞두고 투구 간격을 현행 대비 2초씩 단축했다. 주자가 없을 땐 18초, 있을 땐 23초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마운드 위에서 이전보다 자신만의 루틴을 충분히 가져갈 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보니 투구의 안정감이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 때문이라면 적응해나가면서 점차 안정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자동 투구판정 시스템(ABS) 도입으로 인한 변화다. 포수의 프레이밍에 대한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졌고 반대 투구가 나오더라도 '가상의 네모'만 통과한다면 스트라이크로 판정을 받게 된다. 특히나 좌우 코스에 비해 상하 폭을 잘 활용하는 투수들이 이점을 가져간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심판의 존을 확인하기 위해 존 좌우를 적극적으로 공략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투수들은 사라졌다. 빠른 공을 던지거나 좌우로 다소 날리더라도 존 상단을 노리고 던지는 하이 패스트볼을 많이 활용하면서 투수들이 제구력에 이전보다 신경을 덜 쓰고 있는 게 또 하나의 이유로 분석되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투수들의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꼽을 수 있다. 제구력에 약점이 있는 투수들이 많다보니 가운데로 몰릴까봐 과감하게 승부를 펼치지 못하고 유리한 카운트에서도 도망가는 피칭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여러 이유로 제구에서 어려움을 겪는 투수들이 많아지다보니 심리적으로도 더 쫓기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한 유튜브에서 이대은은 "웬만한 투수들이 타자가 없으면 네모(스트라이크 존) 안에 던질 수 있다. 상대가 못 치게 던져야 하니까 그 심리적 압박 때문에 존을 벗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빼어난 제구력이 강점이었던 신재영은 "저는 타자가 들어서 있어도 20개면 20개를 더 넣을 수 있다. 그런데 홈런을 맞으니까 (승부를) 못 들어가는 것"이라고 자조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감독 B는 능력을 갖춘 투수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에 대해 "버리는 공이 너무 표시가 많이 난다. 말도 안 되게 도망가듯이 던지는 공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놓고 타자를 유인하기 위해 던지는 공이 한눈에 봐도 볼인 것이 티가 나게끔 던진다는 것이다. 많은 야구 전문가들이 앞서도 지적한 부분이다.
물론 쉽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일단 부딪혀 봐야하고 타자를 상대로 공격적인 피칭을 펼치는 데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B 감독은 "그러다보면 쫓겨서 할 수 없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는 상황이 나온다. 반면 타자는 카운트가 불리하면 방어적으로 준비하고 대비를 한다"며 "물론 스태프가 얘기하는 건 쉽지만 던지는 사람이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자신 있게 던지라고 해도 쾅 맞으면 또 도망간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살아 있는 전설 류현진(39·한화 이글스)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류현진은 누구보다 볼넷을 내주는 걸 싫어하는 투수로 공격적인 투구를 펼친다. 올 시즌 탈삼진은 32개에 달하지만 볼넷은 단 5개에 그쳤다. 9이닝당 볼넷이 1.25개로 아리엘 후라도(삼성·1.20)에 이어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달 14일 한화 투수들이 역대 KBO 단일팀 최다인 18사사구를 허용하며 불명예 기록을 세우자 18일 롯데 자이언츠전 7이닝 무사사구 무실점 투구로 본보기를 보이기도 했던 류현진은 6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도 6이닝 1볼넷 1실점 호투로 KBO 통산 120번째 승리를 챙겼다. 특히 한화는 지난해 450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이 부문 최소 2위였으나 올 시즌 벌써 162개의 볼넷을 내주며 압도적 1위를 달리며 KBO리그의 볼넷 증가에 커다란 지분을 갖고 있다. 경기당 5.06개로 작년 3.12개에 비해 폭등했다.
6일 경기 후 류현진은 후배들을 향해 현실적인 조언을 남겼다. 그는 "항상 자신 있게 던지라는 말을 한다. 맞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 투수는 맞는 직업"이라며 "그래서 네모(스트라이크 존) 안에 많이 던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볼넷을 남발하며 리그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투수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