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선수들이 모인 월드컵 무대에서도 K리그 클래스는 통했다. '깜짝 선발'로 나선 이기혁(26·강원FC)이 장신의 체코 공격수들을 상대로 인상적인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12일 오전 11시(한국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사포판의 에스타디오 아크론에서 열린 체코와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2-1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은 0-1로 끌려가던 후반 22분 황인범(페예노르트)의 동점골로 균형을 맞췄고, 후반 35분에는 '캡틴' 손흥민(LAFC) 대신 교체 투입된 오현규(베식타스)가 짜릿한 역전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개최국 멕시코를 비롯해 체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A조에 묶였다. 이번 승리로 한국은 A조 2위에 올랐다. 개막전에서 남아공을 2-0으로 꺾은 조 1위 멕시코를 추격하고 있다. 3위와 4위는 나란히 1패를 기록 중인 체코와 남아공이다.
A조 4팀 모두 전력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첫 경기 결과는 조별리그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한국 입장에선 반드시 승점이 필요한 경기였다. 황인범과 오현규가 골을 넣으며 해결사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팀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숨은 영웅'도 있었다. 주인공은 이기혁이었다.
이기혁은 소속팀 K리그 강원FC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북중미 월드컵 최종명단에 깜짝 발탁된 선수다. 그전까지 A매치 출전 기록은 단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의 첫 월드컵 무대에 참가했고, 수비진 부상 변수 속에 체코전에서 월드컵 데뷔전까지 치렀다.
이날 이기혁은 '괴물 수비수'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한범(미트윌란)과 함께 스리백 호흡을 맞췄다. 데뷔전은 합격점이었다. 전반 한 차례 실수를 범해 상대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내주기도 했지만, 다행히 실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치명적인 미스에 멘탈이 흔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기혁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후 안정적인 볼 컨트롤과 정확한 패스로 빌드업의 출발점 역할을 맡았다. 측면으로 뿌려주는 롱패스, 상대 압박 속에서도 앞선 동료에게 공을 전달하는 침착함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눈에 띈 건 수비력이었다. 체코 공격진은 190cm 안팎의 장신 자원들을 앞세운 팀이다. 2선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루카시 프로보드(슬라비아 프라하)는 189cm, 최전방 스트라이커 파트리크 쉬크는 186cm다. 특히 교체로 투입된 공격수 토마시 호리(슬라비아 프라하)는 신장이 198cm에 달한다.
하지만 이기혁은 타이트한 수비와 적극적인 몸싸움을 앞세워 체코의 장신 자원들을 막아냈다. 체코는 의도적으로 높은 타점을 활용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184cm' 이기혁이 버텨냈다. 신체 조건에서는 불리할 수 있었지만, 영리한 위치 선정과 투지 넘치는 수비 집중력은 돋보였다.
기록도 이를 증명한다. 이날 이기혁은 체코의 장신 군단을 상대로 수비 액션 11회를 기록했다. 헤더 클리어 8회, 걷어내기 8회, 가로채기 3회 등 수비 지표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중볼 경합 성공률도 67%였다.
수비만 좋았던 것도 아니다. 이기혁은 패스 성공률 94%, 롱패스 성공률 67%를 기록했고, 공격 지역으로 향하는 패스도 6차례 성공시켰다. 빌드업에서도 안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축구 통계 매체 풋몹도 이기혁에게 평점 7.6을 부여하며 활약을 인정했다.
이기혁은 여러 장점을 지닌 선수다. 센터백뿐 아니라 풀백,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는 멀티 자원이다. 올 시즌 정경호 강원 감독은 이전과 달리 이기혁을 주로 센터백으로 기용하며 수비 안정감을 부여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여러 포지션에서 팀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큰 강점이다.
지난해에는 피로골절 여파로 아쉬운 시간을 보냈지만, 올해는 이를 완전히 털어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에 올랐다. 최종명단 깜짝 승선에 이어 월드컵 데뷔전 선발 출전, 여기에 인상적인 수비력까지 보여줬다. 이기혁은 체코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