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이었다.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정몽규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축구협회를 맡아 운영하는 동안 여러 가지 논란과 비판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 모든 것은 제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끝난 뒤 축구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 지난 6일 대한축구협회에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사임이 확정됐다. 지난 2013년 제52대 대한축구협회장 취임 이후 4선에 성공했지만, 네 번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는 '불명예 퇴진'이었다.
정몽규 회장 체제에서 대한축구협회 논란들은 그야말로 끊이지 않았다. A매치 경기장에서 울려 퍼진 관중들의 '정몽규 나가' 외침, 국정감사 등 국회에 출석해 해명하는 정 회장의 모습 등은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결국 정 회장은 "모든 부족함과 과오는 오롯이 저의 책임"이라며 물러났다. 직접 팬들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진 않았으나, 13년 간 이어진 정몽규 회장 체제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정몽규 회장이 물러난 뒤, 축구계 곳곳에서 정몽규 전 회장을 감싸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백현식 부산축구협회장은 KBS와 인터뷰에서 "감독 선임 문제나 (승부조작 사범 등 축구인) 사면 문제는 실질적으로 정몽규 회장의 큰 흠결 사항은 아니었다. 정몽규 회장님께서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질 않는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박지성, 이영표가 뭘 안다고, 인생을 얼마나 살았고 사회 경험이 얼마나 있다고 혁신위원회를 하느냐"는 막말 인터뷰로 논란이 된 서강일 전북축구협회장 역시 "정몽규 회장이 이 정도까지 비판을 받아야 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과거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당시 정몽규 회장을 둘러싼 거센 논란에도 정 회장을 지지했던 많은 축구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해 2월 정몽규 회장의 지지율은 무려 85.6%에 달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정몽규 전 회장은 잘못한 게 없다고 감싸면서도, 정작 정 회장 스스로 책임을 진 불명예 퇴진에 동행하려는 이들은 누구도 없다는 점이다. 정 회장의 퇴진에 함께 물러나는 것은 여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 메시지가 될 수 있고, 정 회장에게 보일 수 있는 충성심의 표현일 수 있는데도 그 누구 하나 '동반 퇴진'을 택하는 이는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서강일 전북축구협회장은 "정몽규 회장은 13년 천하가 아니라 13년 희생"이라거나, "하나님 빼고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등 정몽규 회장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지난해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때 공개적으로 정몽규 회장을 지지선언한 바 있다. 백현식 부산시축구협회장을 비롯해 강성덕 충북축구협회장, 박성완 충남축구협회장, 김순공 세종시축구협회장, 이석재 경기도축구협회장, 임종성 경북축구협회장, 권은동 강원도축구협회장, 윤일 제주도축구협회장 등이 당시 서 회장과 함께 정 회장을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했던 시·도 축구협회장들이다.
뿐만 아니다. 서강일 회장의 전북축구협회장 취임식 당시엔 정몽규 전 회장이 당시 후보자 신분으로 전북 전주까지 찾았다. 최근엔 북중미 월드컵까지 정몽규 회장과 동행하고, 숙식까지 축구협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사실이 인터뷰를 통해 드러났다. 이런 가운데 서강일 회장은 K-축구 혁신위원회 구성원들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고, 정몽규 회장을 감싸면서도 정작 자신의 전북축구협회장직은 지키고 있다. 정몽규 회장과 함께 동반 사퇴라는 결단을 하지는 못한 채, 되려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출마 가능성까지 열어둔 상황이다.
물론 앞으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전망이다. 대한축구협회 내부에서조차 정몽규 회장의 불명예 퇴진에 뒤따라 공개적으로 사임을 표한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박항서 부회장이 월드컵 이후 사퇴했지만, 이미 월드컵 전에 태국 2부 감독직 선임이 확정된 터라 이미 예정된 사퇴였다. 앞으로도 축구계 곳곳에서 떠난 정몽규 전 회장을 두둔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이어질 전망인데, 지금껏 그랬듯 자신들의 직까지 내건 외침 대신 자신들의 자리는 그대로 보전하는 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몽규 회장 퇴진 이후 그 누구 하나 동반 사퇴 결단을 내린 이가 없는 건 13년 간 한국축구를 이끌었던 정 회장의 리더십이 딱 그 정도였거나, 정 회장을 따랐던 축구인들이 그만큼 비겁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몽규 회장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론과 동떨어진 외침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덕분에, 한국축구 개혁을 위한 대상들 역시도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