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가 많다. 책 제목처럼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라는 걸 알지만 좀처럼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이쯤 되면 중독된 상태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못하는 건 그만큼 현실과 괴리된 바람(욕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망들이 성취되는 장소로 해석된다. 최근 시청률 30%를 넘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대한민국을 넘어 중국과 아시아에서 한류를 판타지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꼽힌다. 주인공 유시진 대위는 잘생기고 유머러스한데다 나이에 비해 탁월한 능력까지 겸비했다.
아쉽게도 유시진 대위 같은 남자친구를 만날 확률은 강모연 같은 여자로 거듭날 수 있는 확률보다 적다. 강모연 같은 여자친구를 만날 확률 역시 유시진 대위 같은 남자로 거듭날 수 있는 확률보다 적다.
증시 판타지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단 하루에 최대 60%의 수익률을 꿈꾸는 게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장 중 하한가에 주식을 사서 상한가에 팔 수 있는 종목만 선택하면 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지만 당장 전셋값을 올려줄 목돈이 필요하거나 휴가지를 국내에서 해외로 돌리고 싶을때 신기하게도 무모하리만큼 없던 자신감이 생겨나는 곳이다.
판타지는 개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도 해외 진출이라는 판타지가 크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중국 진출에 대한 판타지는 중국 인구수만큼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억명의 인구 중에 1%인 1300만명, 아니 0.1%인 130만명만 고객으로 만들어도 ‘대박’이라는 판타지는 쉽게 그려진다.
현실은 다르다. 과거 중국으로 몰려간 기업 중에 실제 성공한 기업은 많지 않다. 특히 시중은행이나 증권사 등 국내 금융사들은 약 10년동안 투자만 하거나 정보수집만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데 정리도 못한다.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 기업이 흔히 빠지는 판타지는 ‘최초’ ‘최고’라는 타이틀이다. 여기에 금융사가 가지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내가’ 병이다. 서너살 꼬마는 뭐든지 ‘내가’ 해야만 하는 성향을 보이는데 해외에서는 꼬마 신세인 국내 금융사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 법인장을 현지인에게 내주지 못하는 경향도 뚜렷한데 실제로 중국에 진출한 외자 금융사의 기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은 대부분 한국인이라고 한다.
최근 증권업계는 인수·합병(M&A)이 활발하게 일어나며 신흥 ‘빅3’로 정리됐다. 몸집이 커졌다고 해외 진출에 있어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 M&A를 계기로 해외진출에 대한 실력도 커지기를 기대해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