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적 연금의 중국 엑소더스(대규모 이탈)가 현실화한 가운데 국민연금은 미국 전쟁부(옛 국방부)의 조달 사업 참여 금지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업의 홍콩 증시 상장에 투자하면서 중국과의 접점을 넓힌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대상은 미중 간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에서 중국 측 AI 부품 대표기업으로 급부상한 중지이노라이트(7월30일 홍콩 증시 상장)로 AI 관련 부품인 광트랜시버(전기신호와 광신호를 서로 변환하는 장치) 생산기업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의 AI관련기업에 대한 규제 압박 강도를 연타로 높일 예정이지만 국민연금은 다음해 1월까지는 보호예수로 인해 자금을 회수할 길이 사실상 막힌 것으로 파악됐다.
12일 연기금 등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달 20일 블랙록 산하 펀드 등과 함께 총 2억5000만달러 규모의 코너스톤 투자(상장 전 물량을 확정 배정받는 투자) 방식으로 중지이노라이트 IPO에 참여했다. 이는 6월에 미국 전쟁부가 중지이노라이트를 포함한 65개 기업을 중국군사기업(CMC) 명단에 추가해 전체 지정 대상을 188개로 늘린 이후 시점에서 국민연금이 CMC 기업 투자에 나선 것이다. 국민연금이 CMC 지정기업에 신규 투자한 사례가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에서는 6월30일부로 CMC 지정 기업의 전쟁부 조달 사업 참여가 금지됐고 오는 2027년6월부터 간접 조달도 금지된다.
CMC 명단은 미국 국방수권법에 따라 전쟁부가 중국 정부·군 관련 기관과의 소유·통제·연계나 군민융합 기여 등을 근거로 지정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CMC 지정만으론 직접적인 미국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제재가 실효적으로 발동했다.
미국 공적연금이 중국 투자금 회수에 나선 것과 결이 다른 흐름이다. 2024년 11월 앨라배마·펜실베이니아 등 미국 여러 주의 재무관·감사관 등 재무 담당 공직자들은 주 공적연금 수탁자들에게 중국 투자 회수를 촉구하는 공동 서한을 보냈고 같은 달 텍사스 주지사는 주 기관들에 중국 투자에서 손을 뗄 것을 지시했다.
플로리다와 캔자스는 법으로 처분 시한을 못 박았고 인디애나주는 주법으로 공적연금의 중국 관련 투자를 제한했다. 이같은 공적 연기금 행보를 감안하면 국민연금은 미국 공적 연기금이 아니라 사실상 민간 자금에 가깝게 움직인 셈이다. 블랙록은 지난 2023년 미 하원 중국특위 조사에서 미국인들의 노후자금이 인민해방군 무기 개발 기업으로 들어간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공적 연금의 중국 시장 자금 회수는 미국 주법과 행정 지시가 잇따른 결과다. 일부 미국 공적 연기금은 미중 갈등에 따라 중국 투자를 금지하는 규정을 현실화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공급망뿐 아니라 자본 분배 방식도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 연기금에 특정 국가 투자 제한이나 처분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가 없다. 국민연금은 전쟁부 명단 등재 사실을 인지·검토했는지에 대한 질의에 "개별 투자 내역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일각에선 국민연금의 이번 홍콩 IPO 베팅이 지정학적 이슈보다 수익률을 중시하는 국내 연기금 특유의 성향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실제 중지이노라이트는 AI 인프라 투자 붐의 한복판에 있는 기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올해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92.1% 증가한 194억9600만위안으로, 이 가운데 61.7%가 미국에서 나왔다. 그러나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중국산 광트랜시버 수입 제한 규정 초안을 연내 발표를 목표로 검토하면서 직접 타격권에 놓일 업체로 거론된다.
다만 규제가 현실화해도 자금을 뺄 수는 없다. 국민연금이 코너스톤 투자로 사전 배정받은 물량은 2027년1월29일까지 보호예수로 묶였다.
문화 예술 공연 분야에서 중국 측의 한한령(중국 내 한류 제한 조치)이 해제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음에도 CMC의 자본조달에 기여한 셈이다. 중국 AI산업 성장에 따른 수익을 거둘 수도 있지만 리스크를 나눠 지게 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선 전체 포트폴리오의 수익률·리스크 관리는 염두에 두되 미국 공적 연금식 중국 자본시장 철수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중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일부 손실이나 회수 불가능성이 발생하더라도 중국에 베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조폐공사 ESG 위원을 역임한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부 명예교수는 "전체적인 리스크(위험)나 투자 손실 또는 대손 비율을 봐야 한다"며 "최악의 경우는 상장폐지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 벌충을 하면 되는 것으로 회사가 부실하다거나 기술력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미중 간 규제 때문에 생기는 (리스크인) 것인데, (미중 갈등은) 언젠가는 해결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