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하듯 누구를 사랑해 본 적 없어."
"나도 그래."
"이제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됐어."
"…."
사랑했던 부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주인공 테오도르와 불현듯 이별을 선언하는 연인 사만다의 마지막 대화다. 사만다는 인간이 아닌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운영체제(OS)다. "경험을 통해 능력이 커지고 매 순간 진화한다"는 사만다의 이별선언은 어쩌면 예고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사만다는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러브 스토리'를 학습하면서 사랑은 결국 해피엔딩이거나 그렇지 않거나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테오도르도 연인이 자신과 동시에 사랑하는 상대가 641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했을지 모른다. OS와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그린 영화 '그녀(Her)'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AI)이 물질 세계를 넘어 인간 감정의 영역까지 파고들어 올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한다.
◇빅데이터와 컴퓨팅 파워가 이끈 AI의 재등장…AI시장, 2024년까지 연평균 56.1%씩 성장
1956년 학문으로 출발한 AI는 1965년 엑스퍼트 시스템(Expert System)을 도입하며 관심을 받다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지속된 1차 침체기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2차 침체기를 경험한다. 두 차례의 암흑기를 겪은 AI가 재부상한 것은 1990년대 이후 언어학, 뇌과학 등의 학문과 접목되면서부터다.
배영우 IBM 상무는 "엑스퍼트 시스템의 한계로 침체기를 겪은 AI가 다른 학문분야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됐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풍부한 양의 데이터와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팅 파워가 수반되면서 관련 분야 연구는 급증하는 추세다. 2020년이 되면 매일 인당 143GB의 데이터를 생성하고 그 가운데 85%가 AI가 필요한 비정형 데이터가 될 것이란 IBM의 전망처럼 데이터의 생산량 자체가 폭증하는 시대다.
메모리 용량이 1.5년 만에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지속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팅 디바이스가 늘어나면서 기존 컴퓨터로는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자 AI가 더욱 주목받은 측면도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김윤정 박사는 "AI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만 필요한 게 아니라 디지털, 컴퓨팅 파워, 빅데이터 등이 필요하다"며 "이제 상용화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금융, 교육, 의료 등은 물론 사물인터넷(IoT) 영역인 로봇, 스마트카, 드론 등에도 AI 알고리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AI 분야 선구자인 IBM의 역할도 컸다. 업계 최초로 AI에 대한 연구개발에 매진해 온 IBM은 2011년 인지컴퓨팅(Cognitive computing) 플랫폼인 왓슨을 미국의 인기 퀴즈쇼 '제퍼디'에서 선보였다. 2014년에는 클라우드 기반의 왓슨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전담하는 조직인 '왓슨 그룹'을 만들며 왓슨 개발을 본격화했다.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이 그룹에 투자하고 있는 IBM은 왓슨을 플랫폼화해 넒은 의미의 AI 생태계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지훈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IBM과 같은 글로벌 선도기업이 인공지능을 상용화하는 단계에 올라오면서 활용 분야는 엄청난 속도로 확대될 것"이라며 "기술력에 대한 검증이 끝나고 상용화에 나선 시점에서 앞으로 모바일 OS 이상의 파급력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각국 정부·기업, 소프트파워로서 AI 연구·개발…풍요로운 혜택 넘어 일자리 위협이라는 불안감도
AI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인간 삶의 양식 자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 정부와 기업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들은 소프트파워로서 AI가 미칠 파급력에 주목한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2016년 트렌드를 전망한 '미래한국보고서'를 통해 "과학기술은 기술 우위에 있는 국가와 열위에 있는 국가 모두에게 생산적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공동번영의 가치를 창출하는 특성을 지닌다"며 "정치, 외교 등의 소프트 파워를 제고하기 위한 노력이 주목받으면서 공통된 가치 추구의 매개체로 활용될 수 있는 과학기술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장 선도적인 곳은 미국이다. 개별 기업별로도 AI관련 연구를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으로도 연구개발(R&D)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013년 미 정부가 실시한 '브레인 이니셔티브'가 대표적이다. 브레인 이니셔티브는 10년간 총 1억 달러를 AI 분야에 투자하는 정책으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상용화를 최종 목표로 한다.
IBM을 비롯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페이스북, 애플 등이 AI관련 기술에 혈안이 돼 있다. 이들 모두 AI 기술 확보를 위해 전문가 영입은 물론 스타트업 인수합병(M&A)에 한창이다. 이미 관련 서비스도 출시했다.
정부와 기업이 한 마음이 돼 AI에 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지만 AI가 필연적으로 인간 일자리를 위협하는데 따른 우려도 나온다. 2013년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칼 프레이와 마이클 오스본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일자리의 약 47%가 컴퓨터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기계와 협업을 하는 방식이 도입될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기계가 대신 일을 해주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은 우려되는 대목이지만, 반대로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여가 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고무적이라는 시각도 공존한다. 조용수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AI, 로봇 등 똑똑한 기계의 등장에 대해 인간 사회의 반응은 기대와 흥분, 불안과 공포로 엇갈린다"며 "많은 석학들의 조언대로 AI가 인류문명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할지는 누구도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그 열쇠는 인류가 쥐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