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 강을 건넜다.’ SK텔레콤-CJ헬로비전 인수합병(M&A)건을 둘러싼 통신업계 내 반목을 두고 이런 말이 나온다. 합병을 성사시켜야 하는 쪽이나, 막아야 하는 쪽이나 모두 배수의 진을 쳤다. 딴 목소리를 내거나 타협은 곧 배신행위다.
양쪽 모두 해외 M&A 사례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여론전은 기본. 아는 인맥을 총동원한 로비전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 진영이든 지는 쪽에서 옷 벗을 책임자가 수두룩할 것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하다. 이용자 권익과 시장 경쟁에 미칠 영향에 대한 합리적 논쟁은 없고 본질과는 상관없는 마타도어만 판을 치고 있다.
막무가내 식 소송전도 이어졌다. 대형마트 대리점 입점 계약 과정에서 가격 덤핑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 경쟁사를 제소했다가 입증자료 미비로 2주 만에 자진 철회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통신·방송은 전형적인 정부 규제 산업이다. 심판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갈린다. 이 때문에 정부의 정책 결정을 앞두고 기업들끼리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흔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2년 전 유료방송 합산 규제법 제정 당시에는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가 한목소리를 냈다. 유료방송 1위 사업자인 KT에 제동을 거는 법안이었던 까닭이다. 지금은 SK텔레콤의 발목을 잡기 위해 KT와 LG유플러스가 ‘오월동주’했다.
문제는 이번 사안처럼 업계 내 반목이 도를 넘어선 전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얼굴을 붉혔지만 대부분은 상대방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에서 논쟁을 벌였고 규제 당국에 정책을 건의했다. “30여 년간 지켜왔던 업계 룰과 신뢰가 한순간에 완전히 깨진 것 같다.” 얼마 전 만난 업계 원로의 푸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이유다.
정부가 인가 여부를 결정하면 이 싸움도 끝날 것이다.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든지 간에 그 후폭풍과 앙금은 양측 모두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을 것이다. 불신(不信)은 공멸(共滅)을 부를 뿐이다. 앞으로 주요 방송통신 현안마다 합리적 논쟁과 정책건의 대신 비정상적인 술수로 상대방을 압박하는 관행이 정례화 될 것이다. 앞으로 방송통신 업계 내 인수합병은 이유를 불문하고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지난해 10월 말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 발표 이후 반년째 통신업계 시계는 멈춰 있다. 5세대 이동통신(5G), 인공지능(AI)와 사물인터넷(IoT), 가상현실(VR) 등 미래 투자를 비롯한 다른 현안들은 차순위로 밀린 지 오래다. 피 인수기업인 CJ헬로비전도 경영이 올스톱 상태다.
이 지경까지 이른 데는 정부 책임도 없지 않다. 인가 관련 부처들은 양사 M&A가 통신과 방송에 미칠 영향을 보다 신중하게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을 내세우지만, 소신없는 ‘여론 눈치보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SK텔레콤의 인수 추진 발표 이후 진행된 토론회·공청회만 10여 차례다. 더 이상 추가적인 논쟁거리가 있기나 한 걸까 싶다.
정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타이밍도 무시할 수 없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 불똥은 정부로 향할 뿐이다. 어떤 결론이든 모든 당사자들을 만족 시키기는 불가능한 사안이다. 오로지 이용자 권익과 공정 경쟁 환경 등 심사 원칙에 입각한 정책적 결정을 적기에 내리는 것이 그나마 후폭풍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막는 자든 지키는 자든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