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2007년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NHN(현 네이버)을 떠나며 당시 직원들에게 이런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보냈다.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와 결별해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를 향해 주변에선 우려와 걱정이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때만 해도 오늘날의 카카오가 탄생할 것으로 짐작한 이는 드물었다. 네이버의 위세가 워낙 커졌을 때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현재 김 의장이 창업한 카카오는 유일하게 네이버를 위협하는 플랫폼이 됐다. 국내 기업 역사상 이처럼 단기간에 급성장을 이룬 사례가 전무하다.
바야흐로 ‘김범수 시대’가 꽃피고 있다. 지난 3분기 카카오는 매출 1조원과 영업이익 1000억원을 각각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4분기 연속 최대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언택트) 트랜드를 주도하며 실적이 고공행진 중이다. 올들어 주가만 2배 이상 급등했다. 재계 순위도 어느덧 23위(10월 말 공정자산기준)로 올라섰다.
이 덕분에 김 의장 본인도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으로 부상했다.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9월 29일 종가(36만 4500원) 기준, 3분기 말 김 의장의 카카오 주식평가액(지분율 14.23%)은 4조5564억원이다. 연초(1조9067억원)보다 2조 6497억원(139%)나 불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에 이어 국내 주식 부자 4위다. 포브스는 그의 전체 재산을 77억 달러(8조5000억원, 국내 3위)로 집계하기도 했다. 한양대 앞에 PC방을 차리며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30대 청년이 22년 만에 재벌가 2, 3세를 능가하는 부호가 됐다.
김 의장은 맨 주먹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했다. 가맥이나 혼맥으로 얽힌 재벌기업의 성공 공식과는 거리가 멀다. 평범한 집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 1992년 삼성SDS에 입사했다. 하지만 1998년 잘 다니던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창업전선에 뛰어든다. “꿈꾸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좌우명을 따랐다. 서울 행당동 한양대 앞에 차린 PC방 ‘미션넘버원’이 그 시작이다. 카운터에서 모든 PC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6개월 만에 5000만원을 벌었다. 이를 밑천으로 한게임이란 벤처기업을 차렸다. 프로그램을 다운받지 않고 인터넷에서 PC게임을 그대로 실행하는 기술로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1년 6개월 만에 회원 1000만명을 모았다.
2000년엔 삼성SDS 동기였던 이해진과 의기투합해 네이버컴과 합병, NHN을 출범했다. 이후 순탄대로였다. 검색광고와 온라인게임 유료화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안착시켜 4년 만에 최대 경쟁사 다음을 제쳤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2007년 NHN을 나와 다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2010년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오늘날 카카오는 김범수 의장의 승부사 기질의 산물이다. 김 의장은 메신저를 시작으로 포털과 금융, 엔터테인먼트, 모빌리티, 게임, 콘텐츠 등 다양한 영역으로 카카오를 확장하며 ‘카카오 제국’을 건설했다. 카카오톡 네트워크 효과 덕분이다. 카카오톡의 대표 캐릭터이자 김 의장을 닮은 캐릭터 라이언은 이제 메신저 속 이모티콘을 뛰쳐나와 택시, 은행, 골프공, 인형 등 오프라인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올해 카카오톡 출범 10주년을 맞아 또다른 도약을 모색한다. 그동안 적자를 감내하면서 꾸준히 투자하던 자회사들이 잇따라 시장에 안착하며 기업공개(IPO)에 나서고 있다. 지난 9월 증시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카카오게임즈를 시작으로 카카오페이,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지가 줄줄이 IPO를 준비 중이다. 가맹택시를 1만3000대까지 불린 카카오모빌리티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일각에선 카카오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반면 자수성가한 벤처사업가이자 젊은 창업가들의 ‘롤 모델’로 그가 앞으로도 계속 그려나갈 ‘카카오 신화’ 스토리에 기대를 거는 시각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