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주요 앱마켓 사업자들과 한국의 게임사 등 콘텐츠 기업들이 만나 협력을 논의했다. 러시아에서는 한국 게임의 러시아 진출을 독려하면서 역으로 러시아 게임이 한국에 진출하는 방안을 타진했다. 한국 게임사들은 자사 게임과 시스템을 소개하며 러시아 플랫폼 사업자들과의 협력 가능성을 검토했다.
여기까지는 흔한 국가 간 기업 교류의 모습이다. 그런데 현재 상황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미국의 대러 제재 조치가 발동돼 수많은 러시아 기업의 손발이 묶인 상황이다. 한국 정부 역시 미국과 대러 제재의 호흡을 맞추는 가운데 민간 기업들의 '한-러 협력'이 왜 일어났을까.
2년 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해 전면전을 시작한 이래 미국과 EU는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 조치를 이어 왔다. 수출 제한도 이에 해당하는데, 중후장대 산업 외에 문화 콘텐츠까지 상당 부분 포함됐다. 러시아인들은 미국과 유럽의 콘텐츠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울 대체제를 찾고 있는데, 여기서 한 콘텐츠들이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 현지 OTT(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채널을 통해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퍼지고 있고, 웹툰과 애니메이션의 인기도 상당하다. 10월 22일과 11월 12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콘텐츠진흥원이 개최한 한-러 게임교류 포럼도 이 같은 상황에서 게임사들의 러시아 수출길을 보다 원활하게 해주기 위해 열렸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교류'라는 게 일방의 이익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게임사들이 러시아 주요 사업자들과 협력해 현지 진출을 타진하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 게임사들도 한국 시장 진출을 노린다. 실제로 이 포럼에는 플랫폼 기능을 지닌 한국 앱마켓 원스토어와 함께 게임 플랫폼 스토브를 운영하는 스마일게이트가 참여했다.
현재 러시아 게임사들은 대러 제재로 인해 구글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 내 유료 결제가 모두 막혔다. 사실상 양대 앱마켓에서 퇴출된 상황이다. 스팀 등 주요 게임 플랫폼에서도 러시아산 게임의 탑재를 막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 게임사들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데 한국의 게임사 및 플랫폼 사업자들이 이용당할 수 있다.
행사에 참여한 한 게임사 관계자는 "공공기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였기에 참가했고, 러시아에 특별한 제안을 한다기보다 일반적인 회사 소개 및 상황 공유 정도만 진행했다"며 "개별 러시아 기업과 한국 플랫폼 기업이 따로 가진 의견교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전했다.
원스토어와 스토브 등 한국 플랫폼들이 러시아 게임의 수출길을 도울 경우 미국 정부의 금수조치 가이드라인을 위반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금수조치를 포함한 대외 제재를 관장하는 미국 국무부는 유독 해외 기업들의 행동에 민감한 편이다. 과거에 한국 기업 총수들이 북한, 러시아 등 금수조치 대상 국가를 방문할 때마다 제재 이행 의무를 끊임 없이 상기시키고는 했다.
미 국무부는 과거 이란 금수조치 당시에도 군수물자를 거래한 중국 기업들이나 석유를 거래한 유럽 기업들에 대해 미국 내 자산 동결, 미국인 및 미국 기업과의 거래 금지, 금융시스템 이용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한 바 있다.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르면 미국 뿐만 아니라 EU 등 다른 경제권에서도 기업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주요 게임사 중 국내 시장만을 염두에 두거나, 특정 해외시장만 공략하는 곳은 거의 없다. 미국과 중국, EU 등 세계 최대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는 게 정석이다. 당장 미국과 유럽 콘텐츠가 빠져나간 러시아 시장에서 반사이익을 볼 수 있겠지만, 이는 다른 시장에서 돌이킬 수 없는 '낙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정부 차원의 행사에 참석했을 뿐이라는 것도 변명이 될 수 없다. 정부는 대러 제재 위반 여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려주지 않는다. 외교부는 한-러 게임교류 포럼의 제재 위반 가능성에 대해 묻자 "제재대상을 포함하는 파트너십을 추진할 때 미국의 조치에 저촉되는지 여부는 기업들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계엄령 효과'로 엉뚱한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계엄령을 선포하기 전 미국 정부와 사전 교감이 없었다는 데 대해 백악관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가뜩이나 한-미 관계가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에서 러시아 기업들과 손잡는 행위가 곱게 보일 리 없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쟁 중에도 수출 등 민간 교류는 이어져야 하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업 제안 등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가 협력 가능한 사업 수위 등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