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의원님이 비싼 특정 와인만 드세요. 그것도 주문해 주세요."
국회의원 보좌관을 사칭한 사람이 식당에 전화해 30명분 회식을 예약하며 한 와인가게 전화번호를 건넨다. 식당사장은 와인가게에 연락해 수백 만원어치 와인을 주문하고 돈도 입금한다. 예약시간이 지나도 손님은 오지 않고 주문한 와인도 소식이 없다.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짜고 식당주인을 속였다.
지난 9년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이 보이스피싱 통화내역을 녹음한 파일들 중 확인된 정황이다. 국과수 디지털과 AI기술개발연구실의 박남인 실장(사진)은 "경찰 수사관 가족도, 국과수 가족도 당할 정도로 보이스피싱이 교묘해졌다"며 "보이스피싱범의 통화녹음 파일을 분석해 예방을 위한 데이터 추출작업을 해왔다"고 했다.
국과수가 보이스피싱범과 피해자의 통화파일을 모은 것은 2016년부터다. 피해자들은 금융감독원에 피해사실을 신고하면서 통화내역을 제공했다. 이후 경찰청을 통해서도 통화내역이 모였고 이렇게 지난해 10월까지 국과수에 약 9년간 모인 데이터가 2만5000여건에 달한다.
박 실장은 음성파일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제거하고 남은 범인의 목소리를 다룬다. 여기서 성문(聲紋·음성지문)을 추출해 DB(데이터베이스)로 저장한다. 2017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보이스피싱범을 검거했을 때 국과수 DB에서 체포된 범인의 목소리와 일치하는 성문을 찾아내 범인의 과거 추가범행을 밝혀냈다.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해서는 범인의 발언들을 텍스트로 만들어야 한다. 국과수는 통화내역에서 추려낸 텍스트 자료를 국내 이동통신사와 스마트폰 제조사에 제공, 보이스피싱범 특유의 통화패턴을 감지해 통화를 자동 차단하거나 경고 알림을 보내는 서비스를 개발 및 고도화할 수 있게 한다.
문제는 범인이 말한 내용 중 피해자 이름, 주소,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를 마스킹(가리는 작업)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과수에서 이 작업을 담당한 이는 박 실장을 포함해 지난 10년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국과수 본연의 업무는 수사지원이지 보이스피싱 예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 2월 LG유플러스 관계자들이 국과수를 방문했을 때 박 실장에게 이 같은 애로사항을 들었다. 이에 LG유플러스는 자사의 AI 기반 통화서비스 '익시오'(ixi-O)에 쓰이는 핵심 STT(음성인식기술) 알고리즘과 함께 가명처리 솔루션을 무상으로 국과수에 제공했다. AI(인공지능)로 만들어진 가짜 목소리를 뜻하는 '딥보이스' 탐지시스템도 추가로 건넸다. 공공기관 역량강화로 보이스피싱 차단효율이 높아지면 궁극적으로 LG유플러스 고객들의 안전도 지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박 실장은 "기술을 이전받기 전까지 지난 8~9년간 2명이 1만2000개 음성파일을 분석하는데 그쳤고 가명처리는 엄두도 못냈다"며 "지금은 1명이 1년간 1만2000개 파일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업무속도가 빨라졌다"고 했다.
이어 "더 정교한 보이스피싱 스크립트 제작과 탐지 AI엔진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범죄자의 통화데이터를 분석해 여죄여부를 확인하거나 음성 유사도를 기반으로 범죄조직을 군집화하는 등 수사관용 분석도구로 확대적용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