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사'(임상병리사·방사선사·물리치료사·작업치료사·치과기공사·치과위생사)의 업무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법 개정이 추진되자, 의사와 의료기사 간 갈등이 격해지고 있다. 이들은 2022년 당시 간호법 제정이 추진되자 '특정 직역(간호사)의 이익만 대변하는 법안을 막아내자'며 '14보건복지의료연대'에서 공동 투쟁하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의료기사의 권익을 높이는 법안이 발의되자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다.
앞서 지난 13일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국민의힘 최보윤 의원이 대표발의한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의료기사법)은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를 '지도 또는 처방·의뢰에 따라'로 의료기사의 업무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행법에서 의료기사는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진료나 의화학적 검사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의료기사의 업무가 의사·치과의사의 '지도' 외에 '의뢰'나 '처방'에 따라 수행되는 경우도 적잖았다. 이에 남인순·최보윤 의원은 "의료기사가 의사·치과의사의 '지도' 아래에서만 업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는 건 의료현장과 맞지 않는다"면서 "'지도'를 '지도 또는 처방·의뢰'로 개정하려는 것"이라고 법 개정안 제안 취지를 밝혔다.
의료기사들은 내년 3월27일 시행될 '돌봄통합지원법'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의료기사법이 서둘러 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법이 시행되면 노쇠·장애·질병 등으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통합적인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료기사들이 지역사회에 방문해 이들을 돌보려면 '의사의 지도'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사의 '지도'는 의사와 의료기사가 같은 공간에 있어야 가능하지만, '처방·의뢰'는 의사와 의료기사가 다른 공간에 있어도 가능해서다.
대한의료기사단체총연합회는 공식 입장문을 통해 "현재 '의사의 지도' 규정은 원내 업무만 가능한 구조적 한계로 인해 의료기사들이 지역사회나 돌봄 현장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면서 의료기사 전 직역이 개정안 통과를 위해 힘을 모아줄 것을 촉구했다. 한정환 대한방사선사협회 회장은 "방문 돌봄 서비스에 의사가 매번 동반할 수 없기 때문에 '처방·의뢰'는 의사가 하되 '행위'를 의료기사가 할 수 있으려면 의료기사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작업치료사협회도 "지역사회 재활 서비스의 핵심 제공자인 작업치료사가 의사의 처방·의뢰에 따라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현장에서 유연하게 활동할 수 있어야만, 환자의 집과 지역사회 내에서 연속성 있는 돌봄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진다"면서 "환자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국가가 관리하는 면허체계 안에서 지속해서 전문적인 재활 서비스를 받으려면 법이 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의사들의 반발이 거세다. '의사의 지도·감독 없이 행해지는 진료 행위는 의료사고의 증가와 국민 피해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에서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추후 의료기사가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도록 업무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의사의 면허권을 침해하고 국민의 생명·안전에 중대한 위해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법안"이라는 입장이다.
김택우 의협 회장은 "의료법 체계에서 의료기사는 의사의 지도 아래 진료나 의화학적 검사에 종사하도록 명시돼 있는데, 이는 의료행위의 본질이 '의사의 전문적 판단'과 '환자 상태에 대한 책임'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도 이번 개정안은 '지도' 외에 '의뢰나 처방'만으로도 업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허용해, 의사의 감독·책임 체계를 약화하고 무자격자의 의료행위 가능성을 열어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의료기사들은 "이번 개정안은 결코 의사 면허권을 침해하거나 무자격자의 의료행위를 허용하는 법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한정환 대한방사선사협회 회장은 2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의협은 의료기사가 의사 없이 진료를 수행하는 것처럼 호도하는데, 의료현장의 현실과 법적 근거를 모두 무시한 직역 이기주의"라며 "과도한 직역 독점이 오히려 환자 안전과 지역 의료 공백을 초래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이지은 대한작업치료사협회장도 "기존의 '의사의 지도' 중심 규정은 재활해야 할 환자가 병원 밖 지역사회로 나아가거나, 의사가 상주하지 않는 환경에서 작업치료받아야 할 때 불필요한 행정적·법적 불확실성을 야기해왔다"며 "의협은 시대착오적인 직역 이기주의적 주장을 즉각 철회하고,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협력적 의료체계 구축에 동참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