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본의료를 지역에서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를 두고 정부와 의료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정부가 AI를 활용해 지역·필수·공공의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전략을 본격화한 가운데 의료현장에서는 대형병원보다 보건진료소 등 공공 일차의료부터 AI를 실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응급환자의 상태와 병원 자원을 AI로 분석해 이송병원을 연결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지만, 의료인력과 병상 등 자원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AI만으로 지역의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지역의 의료·전산 인프라 확충과 데이터 연계, 보상체계 등 실행조건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은 16일 서울대병원 암연구소에서 'AI 기본의료, 지역에서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를 주제로 제32회 보건의료포럼을 개최했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와 보건복지부가 공동 주최한 이날 포럼은 비대면진료와 공공 일차의료, 응급의료 등 지역 주민의 의료 이용 과정에서 AI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실행조건을 논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서준범 울산대 의대 교수 겸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의료소그룹장은 기조발제에서 AI 기본의료를 '누구나 어디서나 언제나 양질의 의료를 받을 권리, 더 나아가 생애 전주기에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적 개념으로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 7월 AI 기본의료 전략을 공개한 뒤 지역 보건소·의료취약지의 AI 활용과 원격협진, 응급환자 이송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서 교수는 "이것은 일종의 로드맵"이라며 "여기에서 얘기되는 기술들의 대부분은 아직 확보돼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연구개발과 현장 실증, 보상·제도 설계가 뒤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역 현장에서는 AI 도입의 출발점을 대형병원이 아닌 공공 일차의료에서 찾아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박건희 평창군보건의료원장은 "AI를 이야기할 때나 지역·필수·공공의료를 이야기할 때 일차의료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평창은 면적이 서울의 2.4배지만 인구는 4만명에 못 미치고 주민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어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 서비스를 지속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박 원장은 의료취약지에 있는 약 1890개 보건진료소를 지역 일차의료의 최전선으로 꼽았다. 그는 "AI가 시작해야 될 부분은 보건진료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AI 활용을 지속시키려면 보상체계도 바뀌어야 한다고 봤다. 박 원장은 평창의 노인 건강관리 사업에서 1인당 약 100만원을 투입한 뒤 장기간 추적한 결과 대조군보다 의료비와 장기요양비를 합쳐 882만원 적게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비용을 투입한 지자체에는 절감에 따른 직접적인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이 같은 구조를 AI 기반 건강관리에도 적용해 성과에 따른 보상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응급의료에서는 AI를 활용한 환자·병원 연결 기술이 실제 개발되고 있다. 류현욱 경북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연구팀은 현장에서 수집한 환자 정보를 AI가 분석해 중증도와 필요한 치료를 예측하고 병원의 가용 의료자원과 비교해 적절한 이송병원을 추천하는 'SAVE' 플랫폼을 개발했다. 고위험 산모처럼 수술실과 중환자실, 신생아중환자실 등 여러 자원이 동시에 필요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 병원마다 일일이 전화해 수용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다만 AI가 응급환자 미수용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류 교수는 "리소스 자체가 없으면 이런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현장 환자정보와 과거 진료기록, 병원의 실시간 자원정보를 연결해야 하지만 응급상황에서 정보를 공유·활용하기 위한 제도와 기존 소방·의료기관 시스템과의 연계 등도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실행조건을 다룬 논의에서는 AI가 오히려 지역 의료격차를 키우지 않도록 공공 인프라를 먼저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조승연 영월의료원 외과 전문의는 "지역의료 위기는 결국 없는 것의 문제"라며 의사와 시설, 접근성, 야간·주말 진료와 정보가 모두 부족하다고 말했다.
최신 IT 인프라와 투자 여력이 있는 대형병원과 달리 지방 공공병원은 AI 솔루션을 도입해도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클라우드 기반 전자의무기록(EMR)과 표준화된 데이터 체계 등 공통 인프라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 전문의는 "AI는 도입 건수가 성과가 아니다"며 "실제 의료진 공백과 응급환자 미수용 문제 등을 얼마나 개선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령 환자와 AI 의료를 연결할 현지 인력의 역할도 과제로 꼽혔다. 강동윤 울산대 의대 교수는 의료취약지에 AI나 비대면진료 시스템을 구축해도 고령층이 직접 활용하기 어려운 만큼 방문간호사 등 환자 곁에서 정보를 확인하고 진료 이후까지 지원할 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업무와 권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소요시간에 대한 보상도 설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어진 지정토론에서도 지역의 전산·인력 기반 구축과 지역 데이터에 기반한 검증, 현장 인력에 대한 보상·책임 기준 마련, 도입 실적이 아닌 환자 결과 중심의 평가와 사후감시가 AI 기본의료의 실행 과제로 제시됐다. 이영성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책개발위원장은 이날 논의를 '기반·지역·제도·평가' 등 네 가지 과제로 정리했다.
한상원 대한민국의학한림원장은 "AI 기본의료가 지역에서 작동하려면 기술만큼 사람과 제도가 준비돼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이라며 "한림원도 이 조건들을 학술적으로 검증하고 정부에 지속적으로 제언해 AI의 혜택이 지역의료에 도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