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임신중지약인 미프진(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 복합제)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가운데, 일단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임신부에게 미프진을 투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산부인과 의사들이 "미프진 도입을 막을 수 없다면 임신부의 안전한 투여를 위해 원내 처방이 필수이자 최선"이라면서도 "그 대신 의사의 양심적 진료 선택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 따르면 정부는 이르면 내년 1분기 임신 9주 이하를 대상으로 인공 임신중지 약물인 '미프진'을 단계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다. 오남용을 막기 위해 초기 2년간은 병원에서 처방·조제를 함께 하고, 이후 여건이 갖춰지면 의사 처방과 약국 조제 방식으로 전환하는 식이다.
앞서 지난 14일 한성숙 국무총리는 임신중지 의약품(미프진) 도입 추진 방향과 관련해 "병원 내에서만 (처방과 조제가)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윤용근 국민의힘 의원의 질의에 "약국에서 아무나 사서 아무 때나 먹고 (하는) 이런 절차로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의사가 (임신중지약물 처방 뒤) 관찰하고 그 이후에도 의사가 볼 수 있는 아주 보수적 단계로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프진 복용 기준은 약을 한 알씩 총 2회 먹는 방식으로 1제(미페프리스톤)와 2제(미소프로스톨)로 나뉜다. 1제(1알)는 착상을 방지하는 약, 2제는 유산된 태아를 배출하는 약이다. 이재관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고대구로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임신부가 원내 처방으로 1제를 복용한 후 36~48시간 뒤 병원에 다시 와서 약(2제)을 먹는 방식"이라며 "2제를 먹은 임신부의 절반은 4~6시간 뒤부터 출혈과 함께 태아가 배출되기 시작하므로 의료진이 대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2제를 먹은 임신부 가운데 40% 이상은 12시간 이후에 출혈과 함께 태아가 배출된다. 이 약을 먹은 임신부 중 2%가량에선 '불완전 임신중지'를 보일 수 있다. 즉, 태아 신체 일부가 임신부 몸에 남아있다는 것으로, 이 경우 수술이 불가피하다. 이 이사장은 "우리나라에서 미프진이 사용된 적 없는 데다, 미프진 2제 복용 후 다량의 출혈과 불완전 임신중지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초기 2~3년간은 병원 내에서 의료진이 반드시 대기하며 지켜보는 평가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게 학회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에 따르면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주 보건복지부·식품의약품안전처에 의료진의 '안전관리안' 가안을 전달했다. 이 가안엔 △의사의 진료 선택권 △배우자 동의 여부 △의료인의 법적 보호 등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미프진 처방이 합법화하더라도 의사로서 차마 낙태하지 않겠다는 양심적 진료 선택권을 정부가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고 미프진 도입의 전제조건을 달았다.
미프진은 전 세계 50여개국에서 사용된다. 하지만 미프진이 허가되지 않은 국내에선 불법유통이 암암리에 이뤄졌는데, 비싼 값에 거래되거나 짝퉁 의심약이 거래되면서 불법의 그늘에서 미프진을 찾는 임신부의 건강이 위협받는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에 이 이사장은 "미프진을 일반인이 약국에서 처방받아 임의로 투여하게 했다면 도입을 반대했을 것"이라면서도 "미프진이 국내 도입된다면 의료진의 진료·관찰 하에 원내에서 안전하게 관리·투여된다는 전제가 받아들여진 점에 대해서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학계에 따르면 미프진은 적절한 사전·사후 평가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될 경우 임신부의 대량 출혈, 감염, 불완전 유산에 따른 응급수술 위험이 커지며, 이로 인해 패혈증과 사망에 이르는 임신부도 적잖은 것으로 보고된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기자에게 "안전한 원내 투약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소정의 교육을 이수한 산부인과 전문의 중심의 처방 체계, 등록 의료기관 중심의 폐쇄형 공급망, 초음파로 확인한 임신 주수 원칙과 자궁외임신 배제, 지역 응급의료기관과의 사전 연계와 신속한 전원체계부터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료지침을 준수한 의료인의 법적 보호와 양심적 거부권,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수가 체계가 허가 시행일과 함께 마련된다면 의사로서 원내에서 미프진을 처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