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빌리지 않는 기업·가계…中, 일본식 '대차대조표 불황' 빠졌다

베이징(중국)=안정준 특파원
2026.06.29 13:11
리처드 쿠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

중국계 일본 경제학자가 현재 중국 경제가 민간 대출과 투자가 줄어 성장이 둔화되는 1990년대 일본식 '대차대조표 불황'에 빠질 우려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민간이 돈을 쓰지 않는 상황에선 금리를 내려도 경기를 부양하기 어렵다는 것. 인프라와 연구개발(R&D)에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게 해법으로 제시됐다.

리처드 쿠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9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 기업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면 성장률 5%란 숫자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며 "생산 측면만 보면 5% 성장이 맞을 수도 있지만 현재 중국은 소비와 지출이 충분치 않다"고 밝혔다.

쿠 이코노미스트는 1990년대 일본의 장기침체를 '대차대조표 불황'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해 잘 알려진 인물이다. 대차대조표 불황은 자산가격 급락 이후 기업과 가계가 투자와 소비보다 부채 상환을 우선하면서 경제 전체의 수요가 장기간 위축되는 현상을 뜻한다. 쿠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중국 경제가 부동산 버블 붕괴와 민간 부채 축소, 낮은 국채금리 등에 측면에서 과거 일본과 유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중국이 일본식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는지를 판단할 때 가장 주의 깊게 보는 지표는 10년물 국채금리"라며 "현재 중국의 10년물 국채금리는 1.7~1.8%인데 투자 기회가 많다고 알려진 국가치고는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렇게 금리가 낮다는 것은 민간이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출 대신 기존 빚을 갚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민간이 저축은 계속하지만 돈을 빌리지 않으면 금융기관은 넘쳐나는 예금을 운용할 곳이 사라져 결국 정부만 사실상 유일한 차입자가 된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일본도 현재의 중국과 똑같았단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일본 버블 정점이었던 1990년에 10년물 국채금리는 약 8%였지만 1997년에는 1.7%까지 떨어졌다"며 "당시 낮은 금리는 채권시장이 정부에 보내는 경고였고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 지출해야 했지만 일본 정부는 재정지출을 축소해 적자를 줄이는 길을 택했고, 그 결과 일본 경제는 급격히 무너졌다"고 했다.

1.7% 국채금리는 불황 신호…기술력도 막지 못해

그는 "당시 일본의 국채금리와 같은 수준의 현재 중국 국채금리를 보면 중국 경제는 여전히 어려운 국면에 있다고 본다"며 "중국 정부가 1990년대 일본 정부와 같은 실수를 한다면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0년물 국채금리가 1.7%까지 떨어졌단 것 자체가 이미 대차대조표 불황에 들어섰단 강력한 신호"라며 "현재 중국에서는 많은 지방정부가 공무원 임금조차 충분히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역시 좋지 않은 신호"라고 설명했다.

기술력이 뛰어나도 장기침체는 막지 못한다는게 그의 분석이다. 쿠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에선 거대한 내수시장과 AI·반도체 등 첨단기술이 있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르다는 의견이 많다"며 "하지만 1990년대 일본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자동차, 전자산업을 보유했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었지만 기술력이 장기침체를 막아주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민간이 돈을 빌려 투자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이징=AP/뉴시스] 중국 정부가 소비 부양을 위한 ‘소비재 이구환신(以舊換新, 노후품 교체)’ 정책의 일환으로 제3차 지원금을 내달 풀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베이징의 한 화웨이 매장 앞에 한 남성이 화웨이 신제품을 구입하고 서있는 모습. 2025.06.26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현재 중국이 추진중인 소비쿠폰 지급 등 현금지원책 보다 정부가 직접 투자와 사회사업에 돈을 쓰는게 효율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민간이 빚을 줄이는 데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세금을 깎아주거나 현금을 지급해도 그 돈은 소비나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대부분 부채 상환에 쓰이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감세도 적절한 정책이 아니다"고 했다.

쿠 이코노미스트는 "정부는 소비자나 기업에게 돈을 나눠주는 대신 직접 그 돈을 집행해야 한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 가운데 사회적 수익률이 현재 중국 10년물 국채금리인 약 1.7%보다 높기만 하면 어떤 사업이든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 사업은 결국 스스로 비용을 회수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하기 때문에 납세자의 부담으로 남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만약 중국 지도층이라면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회 전체에 높은 수익을 가져다줄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함께 논의하도록 할 것"이라며 "디플레이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이 같은 재정지출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