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진흙탕 비껴간 '온건파'…변방의 버넘, 英 총리 초고속 입성

뉴욕=심재현 특파원
2026.07.17 22:05

당내 전폭 지지 '단독 추대'
20일 59대 총리 공식 집권
지방 분권·재산업화 선언

앤디 버넘 영국 노동당 신임 대표. /사진=AFP

영국 집권 노동당의 앤디 버넘 하원의원(56)이 17일(현지시간) 새 당 대표로 취임하면서 키어 스타머 총리의 후임 총리로 확정됐다. 노동당은 이날 특별 당대회에서 대표 경선 후보로 단독 등록한 버넘 의원을 신임 대표로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버넘 대표는 오는 20일 영국 59대 총리로 공식 취임할 예정이다. 지난달 18일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하원에 재입성한 지 한달 만이다.

노동당이 2024년 7월 총선 당시 하원 650석 중 412석을 휩쓸며 14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뤘을 때만 해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정가에서 앤디 버넘이라는 이름은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다. 버넘 대표는 2017년부터 잉글랜드 북부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을 지내며 '북부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지역 내 입지는 확고했지만 중앙 정가에서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역설적으로 중앙 정치와 거리를 둔 온건파 행보가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제1야당 시절 노동당은 제러미 코빈 전 대표 체제의 극단적 좌향좌 노선과 중도파 스타머 총리의 집권 과정에서 심각한 파벌 싸움을 겪었다. 버넘 대표는 이 와중에 중앙의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당내 여러 진영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웨스트민스터 정가에서 "술집에 블레어파, 브라운파, 코빈파가 들어갔더니 바텐더가 '앤디, 뭐 드릴까요'라고 물었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버넘 대표는 어느 쪽에서도 배척당하지 않는 탄탄한 지지 기반을 다져왔다.

스타머 총리가 국정 비전 부족과 정책 유턴, 소통 부재로 실각 위기에 몰리자 노동당은 카리스마와 행정 성공 스토리를 가진 버넘 대표를 구원투수로 낙점했다. 맨체스터 메이커필드 지역구 의원이 자진 사퇴하면서 보궐선거를 통해 버넘 대표를 복귀시켰고 끝까지 버티던 스타머 총리의 사임을 이끌어냈다. 당 대표 경선에선 소속 하원의원의 80% 이상이 버넘 대표를 지지하면서 잠룡들의 출마를 차단해 경선을 조기에 단독 추대 형식으로 매듭지었다.

버넘 대표는 스타머 총리보다는 왼쪽, 코빈 전 대표보다는 오른쪽에 선 온건 좌파로 분류된다. 버넘 대표는 이날 당 대표 취임 연설에서 "1980년대 이후 잘못된 길로 들어서 정치권력이 중앙집권화되고 경제 권력은 민영화됐다"며 경제 개혁과 공공 통제 강화, 재산업화를 골자로 한 '선명한 노동당' 비전을 선언했다.

버넘 대표는 특히 주택, 교통, 교육 등 일상생활 직결 권한을 지역에 이양해 각 지역 맞춤형 발전을 추구하는 '맨체스터리즘'을 중앙 무대에 전면 도입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맨체스터에 제2의 총리실인 '북부 총리실'을 설치해 지방 정부와 효율적인 업무 조율을 이뤄내겠다고도 밝혔다.

중도 실용주의에 치우쳐 고유의 색채를 잃었다는 당내 좌파 진영의 반발과 지지층의 실망감을 달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버넘 대표는 리버풀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5세에 노동당에 입당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문화부·보건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내각 경험도 쌓았다. 2017년 이후에는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으로 세 차례 60%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됐고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보리스 존슨 정부의 봉쇄 보상안에 정면으로 맞서며 전국적인 리더로 체급을 키웠다. 네덜란드 태생의 마케팅 임원 출신인 부인 마리프란서 판헤일 여사와 사이에 1남 2녀가 있다.

'버넘호'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 대표 선출 후 4년 동안 예비내각을 이끌며 검증받았던 스타머 총리도 국정 운영에 실패한 상황에서 중앙정치 무대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버넘 대표의 짧은 준비 기간은 불안 요소라는 지적이다. 영국이 직면한 경제 성장 둔화와 빈약한 공공 재정이라는 현실적 한계 앞에서 좌우 포퓰리즘 득세와 기성 정당 체제 붕괴라는 정치적 파도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가 버넘 행정부의 성패를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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