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해 온 유럽에 비해, 중국이라는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된 아시아 동맹국들이 미국 우선주의에 보다 신속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 존 리는 최근 포린어페어스 기고문 '아시아는 어떻게 미국 우선주의와 공존하는 법을 배웠나(How Asia Learned to Live With 'America First')'에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전후 국제질서의 규칙을 흔드는 가운데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며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 규범과 복지를 중시해 온 서유럽보다 중국이라는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된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중심의 거래적 질서에 더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리 연구원은 먼저 냉전 종식 이후 서유럽 국가들이 지나치게 안정된 안보 환경에 익숙해졌다고 짚었다. 소련 붕괴 이후 서유럽은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다는 전제 아래 국방력보다 경제성장과 복지 확대를 우선하며 이른바 '평화배당금'의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며 위협을 키웠지만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에야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서유럽이 안보보다 복지를 우선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두 개의 완충지대가 꼽힌다. 하나는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에 위치한 동유럽이라는 지리적 완충지대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유럽 방어 참여를 제도화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는 안보 완충지대다. 서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보호막 속에서 복지에 투자하는 한편 국제기구를 통해 세계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는 이러한 유럽식 모델을 정면으로 흔들었다.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동맹 체제를 유지하는 데 과도한 비용을 부담했고, 그 과정에서 동맹국들이 미국의 안보와 시장을 활용해 이익을 누려왔다는 문제 제기다. 이에 미국은 동맹국에 더 많은 투자와 시장 개방, 전략산업의 이전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국의 보호와 시장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제시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압박받고 있다.
리 연구원은 유럽이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기존 영향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으며, 미국의 압박에 맞서기 위해 내부 결속을 유지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트럼프 시대 유럽의 핵심 전략은 미국과 개별적으로 협상하기보다 '유럽연합(EU)'이라는 단일시장과 정치적 블록을 바탕으로 집단적 협상력을 행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아시아 동맹국들은 서유럽보다 훨씬 불안정한 안보 환경에 놓여 있다고 봤다. 아시아에는 나토와 같은 집단방위기구가 없으며, 미국에 새 행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각국은 자신의 전략적 가치와 기여도를 다시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9년 닉슨 행정부가 발표한 '괌 독트린'은 아시아 국가들이 재래식 공격에 대한 자국 방어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만 문제에서도 미국은 중국이 공격할 경우 군사적 개입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은 백악관의 인사와 정책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리 연구원은 아시아가 마주한 가장 직접적인 위협으로 중국의 부상을 지목했다. 중국은 역내 경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막대한 국방비를 바탕으로 해군력과 미사일·핵 전력, 첨단기술 역량을 빠르게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도 유럽 안보에 실질적인 위협이지만, 장기적인 경제력과 산업 기반을 고려하면 중국의 힘이 훨씬 강력하다. 따라서 아시아 국가에는 미국의 군사력과 개입 의지가 국제규범이나 외교적 선언보다 훨씬 중요한 안보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과도한 무력 사용을 우려하면서도, 미국이 적절히 개입하지 않을 때에도 불안감을 느낀다는 분석이다. 일례로 오바마 행정부가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과 관련해 레드라인을 실행하지 않았거나,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군사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않았을 때 동맹국들의 불안은 커졌다. 리 연구원은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강한 미국이 아니라 약하거나 개입 의지가 불분명한 미국"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트럼프의 일방주의와 거래주의가 유럽보다 아시아에서 더 쉽게 수용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아시아 동맹국들은 미국의 요구가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더라도, 그것이 안보공약을 유지하는 비용이라면 일정 부분 감수하려 한다. 국제법과 다자주의를 중시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구상을 지지하면서도, 실제 정책에서는 미국과의 양자 협상을 통해 관세와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적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25년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이른바 '해방의 날 관세'에 대해 한국, 일본 등은 기존 무역협정과 충돌한다고 비판하면서도 대규모 투자와 에너지 구매, 반도체·핵심광물 분야의 협력을 제시하며 협상에 나섰다. 리 연구원은 "이들에게 무역협상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의 안보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러한 아시아의 전략에도 위험은 존재한다고 짚었다. 미국과의 동맹이 물질적 거래 위주로 변하면 민주주의와 법치, 자유라는 공동 가치에 기반한 연대가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무엇보다 미국이 중국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동맹국의 안보를 거래 대상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나 안보 지원이 미중 협상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미국의 요구를 충실히 수용한 국가도 언제든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 역시 어려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봤다. 미국 안보 의존도를 낮추려면 국방비를 대폭 늘리고 독자적인 방위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복지지출을 줄이거나 세금 부담을 높이면 국내 정치적 반발이 발생할 수 있다. 유럽 내부의 안보 인식 차이도 문제다. 러시아와 가까운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생존의 문제로 인식하지만, 서유럽은 전략적 자율성과 대미 의존 축소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에도 과거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완전히 복원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리 연구원의 판단이다. 미국에서는 동맹국이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정당과 이념을 넘어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동맹국이 직면한 과제는 과거와 같은 평등한 협력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거래적인 관계 속에서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효과적으로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 연구원은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세계에서 미국과 협력하려는 아시아 동맹국들의 의지는 각 국가들을 더욱 강하고 안전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며 "유럽은 더 늦기 전에 안보의 대가를 스스로 부담하고 워싱턴의 새로운 규칙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