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현지시간) 덴마크의 한 군부대로 검은색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인물은 덴마크 왕위 계승 서열 2위 이사벨라 공주(19). 수행원도 전담 기사도 없이 온 그는 지난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 입대를 선택했다.
덴마크 매체에 따르면 이사벨라 공주는 동기 1600명과 함께 '근위 후사르 연대'에서 앞으로 11개월간 복무한다. 덴마크 정부와 의회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인 2024년 4월 기존 4개월이던 복무기간을 11개월로 늘리는 국방 개혁을 단행했다. 또 만 18세 이상 여성들로 징병제를 확대했다. 공주는 이 개정안을 온전히 적용받는 첫 번째 전체 입소 기수다.
할머니 마르그레테 2세 전 여왕, 어머니 메리 왕비도 군 경력이 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일반 징집병은 월급 180만원, 식대 약 165만원 등 한 달에 345만원 급여를 받지만 공주는 이를 포기했다.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 아니다. 덴마크 왕실이 국방력 강화에 사활을 거는 속사정엔 그린란드 이슈가 있다.
지난 3일 로이터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그린란드 병합에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징집병을 배치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앞서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령인 그린란드 매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눈독을 들인다는 보도로는 처음이었다. 보도 다음날 아네 로네 바게르 당시 그린란드 외교부 장관은 "미국과의 사업은 환영하지만 우린 매물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린란드는 희토류 등 풍부한 자원이 있고 북극 항로의 요충지로 꼽힌다. 경제적, 지정학적 가치가 커지자 강대국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덴마크 정부는 2025년 1월 북극권 안보 강화를 위해 약 146억 덴마크 크로네(약 3조 2000억원) 규모의 북극 안보 패키지 예산을 투입했다. 또 이 달 말 최초로 그린란드에 징집 병력 일부를 배치할 예정이다.
덴마크 이사벨라 공주처럼 유럽 왕실 국가에서는 왕족들이 먼저 나서 군사 훈련을 받는 게 드물지 않다. 이는 왕실의 존재이유와 직결된다. 민주주의 시대에 왕실을 유지한다면 국민 지지가 필수다. 비록 실질적 '통치'는 하지 않아도 국가를 이끄는 위상을 인정 받으려면 군 복무로 국가와 국민들 위한 의무를 다한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영토 확장 계획,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으로 유럽 국가들은 냉전기 이후 또다시 안보 위기를 맞았다. 이런 가운데 국민 결속을 다지고 국방력을 강화하다보니 왕족의 '솔선수범'이 더욱 주목받게 됐다. 영국 BBC는 "유럽 국가들은 더 이상 미국에 유럽 안보를 맡길 수 없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스웨덴 차기 왕위 승계자인 빅토리아 왕세녀(49)는 지난해 3월 '네임데이 '행사에 군복을 입고 등장했다. 네임데이는 날짜마다 사람의 이름을 배정해 매년 그날을 기념하는 스웨덴의 전통문화다. 이름이 적힌 날짜에 가까운 이들에게 축하받는 '제2의 생일'로 여겨진다. 생일 파티에 군복을 입고 등장한 셈이다. 스웨덴 왕실은 "국가 원수로서의 미래 임무를 준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미래 국가 원수이자 최고 군 통수권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행보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막시마 왕비(54)는 지난 2월 네덜란드 육군 예비군에 입대했다. 네덜란드 예비군은 55세까지 입대가 가능하다. 네덜란드 왕실은 왕비가 사격, 로프 하강, 입수 훈련 등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막시마 왕비는 우리의 안전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다른 많은 이들처럼 안보에 기여하고자 지금 입대를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막시마 왕비의 딸인 카타리나 아말리아 왕세녀(22)는 지난 4월부터 네덜란드 국방대학교(NLDA)에서 운영하는 군사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해 공군 하사로 복무 중이다. 네덜란드 국방부는 그가 지난 1월 NLDA에서 일반 군사 훈련 과정을 수료한 뒤 심화 과정을 밟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말리아는 무기 조작, 항법, 위장술, 장애물 코스 훈련 등 육해공 군사 훈련을 모두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차기 국왕이 될 레오노르 왕세녀(20)는 2023년 17세의 나이로 육군 사관학교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해군 사관학교를 거쳐 지난해 9월부터 공군·우주군 종합 아카데미(AGA)에서 공군 훈련을 받았다. 그는 지난 7월 3년 간의 군사 훈련을 마치고 해군 소위로 진급했다. 아버지인 펠리페 6세에게 왕위를 계승 받고 나면 스페인 군대의 통수권자가 된다.
영국 또한 왕실 인사들이 국난이나 전쟁 때 직접 참전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자 자부심이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전 여왕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차량 정비병 훈련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전 여왕의 부친인 조지 6세는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됐다. 엘리자베스 전 여왕의 아들이자 찰스 현 국왕의 남동생인 앤드루 왕자(66)는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 당시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엘리자베스 전 여왕의 손자인 해리 왕자(41)는 2007년과 2012년 두 차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항공통제관과 아파치 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해리 왕자는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상입은 동료를 보고 국제 상이군인 스포츠대회인 '인빅터스 게임'을 창설하기도 했다. 2029년 10월 대한민국 대전에서 제9회 인빅터스 대회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