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8일 오후 6시 30분(현지 시간), 버킹엄궁은 "여왕이 밸모럴성에서 평온히 돌아가셨다"고 발표했다. 향년 96세.
1952년 즉위해 70년간 영국 왕실을 이끌며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영국 왕실 역사에도 장장 70년에 걸친 재위의 마침표가 찍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여성 군주로, 총 70년 214일간 왕좌를 지켰다.
1926년 4월 21일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6일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서거하면서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다시 여성 군주를 맞이하게 된 영국 국민은 대체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대영제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빅토리아 시대를 직접 경험했던 세대에게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오른 시기는 영국의 국제적 위상이 빠르게 변화하던 때였다. 탈식민화가 본격화하면서 대영제국의 영향력이 축소됐고, 왕실의 역할에도 변화가 요구됐다.
정치적 실권은 없었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의 결속을 다지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3년 11월부터 이듬해까지 약 6개월간 영연방 국가들을 순방하며 각국과의 관계 강화에 힘썼다. 특히 인도 방문은 상징성이 컸다.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변화하는 영국과 영연방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영연방과 영국 왕실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1977년 즉위 25주년인 실버 주빌리 당시에는 영연방 국가 정상들이 런던에 모여 여왕의 재위를 축하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왕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왕실이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언론에서는 여왕의 대중 소통 능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엘리자베스 2세는 변화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고 왕실 개혁에 나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0년대 후반 제작된 다큐멘터리 '로열 패밀리'다.
왕실의 일상을 대중에게 공개한 이 다큐멘터리에는 가족들이 바비큐를 즐기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거나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기존의 권위적인 왕실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국민적 존경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2세도 왕실을 둘러싼 각종 스캔들을 피하지는 못했다. 특히 장남 찰스 3세와 그의 전처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 생활과 갈등은 왕실을 뒤흔든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찰스 3세와 다이애나는 1981년 결혼해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낳았으나 1992년 별거에 들어갔다.
별거 중이던 1995년 다이애나는 BBC와 단독 인터뷰를 진행해 왕실과 남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왕실 내부의 갈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찰스 3세와 다이애나는 1996년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그러나 이혼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97년 8월,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왕실은 또다시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다이애나의 장례 절차와 관련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영국 국민의 여론도 급격히 악화했다. 결국 여왕은 다이애나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했고, 다이애나의 운구 행렬이 버킹엄궁 앞을 지날 때 고개 숙여 묵례했다.
무거운 왕실의 책무와 숱한 사건 속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는 굳건히 왕좌를 지켰다.
2011년에는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국빈 방문해 양국 간 화해와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듬해에는 북아일랜드를 방문하며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관계 개선에 힘을 보탰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영화 '007' 시리즈의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영상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여왕이 비밀요원 '제임스 본드'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행사장으로 향하는 장면은 당시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202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공개하며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건강 문제와 부상 등으로 공식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아졌다.
2022년 5월에는 찰스 3세 당시 왕세자가 여왕을 대신해 영국 의회 연설을 대독했다. 여왕이 즉위한 지 70년 만에 처음으로 왕세자가 여왕을 대신해 의회 개회 연설을 맡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해 9월 8일, 70년 넘게 영국 왕실의 중심을 지켜온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여왕은 이날 오후 3시 10분 밸모럴성에서 숨을 거뒀다. 마지막 순간에는 장녀 앤 공주와 개인 비서 겸 스타일리스트 안젤라 켈리 등이 곁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사인은 '노환'으로 기록됐다.
장례식은 2022년 9월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여왕의 관은 윈저성으로 옮겨졌으며, 남편 필립공과 부모인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대비 등이 안치된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조지 6세 기념 예배당에 안장됐다.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후 영국의 국가 상징물과 화폐 등에 사용된 여왕의 초상도 차례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70년간 왕좌를 지켜온 여왕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3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영국 왕실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