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38년 지나도 회자되는 탈주범 외침[뉴스속오늘]

박효주 기자
2026.10.16 06:04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88년 10월16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한 가정집에서 탈주범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채널 KBS 히스토리 갈무리

1988년 10월16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한 가정집에서 탈주범 지강헌 일당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 1000여명이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인질극은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인질극은 탈주범 3명이 숨지고 1명이 붙잡히면서 끝났다. 하지만 지강헌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법 불평등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교도소 이송 중 12명 집단 탈주

사건 시작은 1988년 10월8일이었다.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 25명이 지방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12명이 집단으로 탈주했다.

지강헌 일당은 미리 준비한 흉기 등으로 교도관들을 위협하고 권총을 빼앗아 달아났다. 서울 시내로 숨어든 탈주범들은 경찰 추적을 피해 가정집에 침입하고 주민들을 인질로 잡으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일부는 경찰에 붙잡히거나 자수했지만 지강헌을 비롯한 4명은 끝까지 도주했다.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 25명이 지방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12명이 집단으로 탈주한 뒤 유포된 현상수배 전단. /사진=유튜브 채널 KBS 히스토리 갈무리

이들은 10월14일 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한 가정집에 침입해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머물렀다. 다음 날 밤에는 북가좌동의 다른 가정집으로 옮겨가 일가족 6명을 붙잡았다.

16일 새벽 집주인이 빠져나와 경찰에 신고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주택 주변을 포위했고 지강헌 일당과 협상을 시작했다.

경찰 1000여명 포위…TV로 생중계된 인질극

지강헌 일당은 권총과 흉기로 인질들을 위협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지강헌은 경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현장에는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인질극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지강헌은 경찰과 언론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쏟아냈다.

그가 외친 말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가벼운 처벌을 받고, 돈이 없는 사람은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는 주장이었다.

대치가 이어지던 중 탈주범 강영일이 자수 의사를 밝히면서 일당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다른 탈주범 2명이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홀로 남은 지강헌은 경찰에 영국 음악그룹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지강헌은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경찰은 곧바로 집 안으로 진입했고 이 과정에서 지강헌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았다.

지강헌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과다출혈로 숨졌다. 인질로 잡혀 있던 가족들은 모두 구조됐다.

500만원대 절도에 징역 7년·보호감호 10년

탈주범 지강헌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글 일부. /사진=유튜브 채널 KBS 히스토리 갈무리

지강헌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당시 형벌의 형평성 문제와 맞물려 큰 파장을 낳았다.

지강헌은 500여만원을 훔친 상습 절도 등의 혐의로 징역 7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보호감호는 재범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된 사람을 징역형이 끝난 뒤에도 별도 시설에 수용하는 제도였다. 징역 7년과 보호감호 10년을 모두 채울 경우 최대 17년 동안 사회와 격리될 수 있는 셈이었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으로 재직하며 수십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의 범죄 전력과 적용 법률이 달라 단순히 범죄 금액만으로 형량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강헌의 외침은 당시 사회에 퍼져 있던 권력과 부에 따른 불공정 인식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

지강헌 일당의 탈주극은 이후 2006년 영화 '홀리데이'로도 제작됐다. 보호감호제도는 인권 침해와 이중처벌 논란 끝에 2005년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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