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LIFE]KB자산운용 이원기 대표이사

가로와 세로 각각 열아홉 줄을 그어 생긴 네모난 나무판. 검은 돌과 흰 돌이 번갈아 마주치면서 더 많은 집을 차지하는 5000년 역사의 게임.
이원기 KB자산운용 대표이사(CEO)는 361개의 십자형 격자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이 대표는 바둑 실력이 아마추어 4단이다. 자산운용업계에서 이대표 이상의 실력을 갖춘 CEO는 CJ투자증권의 김홍창 사장 정도로 알려져 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반드시 한달에 1번 이상은 '맞수'를 찾아 대국을 펼친다는 이대표는 바둑에서 얻은 인생의 교훈이 가장 값지다고 털어놨다.
◇"인생의 스승"=이대표가 바둑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고, 고교 시절에는 오묘한 매력에 빠져 향후 인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로 자리매김했다.
"흑백의 돌들이 점을 따라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승부에 한동안 빠져 헤어나지 못했죠. 상대와 마주앉아 이기기 위한 지략싸움은 스릴 만점이었습니다. '삼매경에 빠진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하면 할수록 무궁무진한 수싸움에 다른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하루는 대학시절이었다. 한겨울 어둑해진 저녁 어느날. 눈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많이 왔다. 사당동 고갯길에서 버스를 친구 2명과 타고 압구정동의 집으로 바둑을 두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눈에 막혀 버스가 나아가지 못했다.
이대표는 흰 눈 위에 새겨진 검은 선들과 바둑일이 눈 앞에 어른거려 버스에서 내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몇 시간에 걸쳐 집으로 도착한 이대표는 친구들과 밤새 바둑을 두면서 행복함을 느꼈다고 했다.
"바둑에서 지혜를 배웠다고 보면 됩니다. 젊은 시절 바둑 외에 각종 악기도 취미로 기르기 위해 다뤄봤지만 지금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상황과 시기에 따라 지혜를 찾기 위해 기대는 바둑이 동반자입니다."
이대표는 은퇴후에는 3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첫째는 바둑과 연관된 일. 지금은 바빠서 자주 하지 못하는 바둑도 많이 두고, 관련된 글도 많이 쓸 예정이다. 특히 세인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관전평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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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고대문명 유적지를 찾아 인류사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싶다.
이집트와 그리스, 중국, 페루 등 해외 고대 문명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인류의 근원을 호흡하고픈 생각이다.
세번째는 우주에 대한 꿈이다.
바둑의 끝없는 수에서 자극받았다. 5000년 동안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바둑의 기보처럼 미지의 우주를 좋은 망원경을 구입해 관측하고 싶은 바램이 있다.
◇"주식시장도 반전무인(盤前無人)의 자세로"=바둑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반전무인(盤前無人)이라고 이대표는 설명했다.
반전무인은 바둑판 앞에 아무도 없다는 의미다. 상대의 마음을 읽고 호흡을 느끼면서도 상대를 잊고 판에만 몰입한다는 뜻이다.
반드시 상대가 존재하는 바둑. 수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고 상대의 호흡을 느끼며 혼신을 다해 응대해야 한다. 하지만 승부를 의식하는 순간 심신이 흐트러져 지고 만다.
특히 결정적 승부처에서 악수를 뒀거나 상대의 묘수가 파고들 때 반전무인을 지키기 힘들다. 상대가 있지만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선이라고 이대표는 강조했다.
"주식시장도 바둑과 비슷한 점이 많죠. 다만 바둑과 달리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해야 한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펀드매니저 시절에는 이같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매일매일 피말리는 전쟁을 치렀죠."
"펀드매니저라면 타고난 운명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열리는 주식판에서 반전무인을 잊는 순간 언제나 패배감을 맛봤습니다. 바둑 한판이 끝나면 복기를 하듯 증시에 맞서 패한 날은 천천히 그날의 패배 요인을 더듬어봤습니다. 아마 바둑이 주는 교훈이 없었다면 늘 새롭게 열리는 전쟁터에서 버텨내기 힘들었을겁니다."
'한 수 배웠다' 는 말처럼 바둑은 지고도 무엇인가를 깨닫는 매력이 있다고 이대표는 말했다. 바둑에 진 뒤 '상대의 수'와 요인을 분석하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고 승부욕만 앞세워 매일 증시와 전투를 치렀다면 지금까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자산운용은 호흡이 중요합니다. 세력이 강할 때와 약할 때 모두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죠. 그러나 사람이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패착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죠. 언제나 증시에 맞서는 호흡을 잃어버리지 않는 힘을 바둑으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이대표는 운용업계도 바둑의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바둑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한판을 두면 피오줌을 누고 체중이 몇 킬로그램씩 줄죠. 운용업계도 바둑의 이런 정신을 가질 필요가 있죠. 고객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게 앞으로 운용업계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