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인문학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한가로운 소리'를 하는 학문으로 치부됐다. 대학이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닌 '취업사관학교'가 돼버렸을 때 인문학 전공자는 필사적으로 경영·경제 관련 학과를 복수 전공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 숫자와 지표로 나를 증명할 수 없는 학문은 쓸데없는 학문이 돼버렸고 학과 통폐합대상에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그렇게 오롯이 취업과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현대인에게 남은 것은 공허한 자아다. 목표를 달성했을지언정 나를 찾고 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뿌리가 땅에 단단히 박혀 아래로 뻗어 나가기도 전에 위로 더 빨리, 더 많이 자라는 데만 급급한 결과다.
작가 정여울의 책 '공부할 권리'가 반가운 것도 그 때문이다. "외적인 성장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아래로 자라는 법, 내면으로 자라는 법, 무의식 깊숙이 영혼의 닻을 내리는 법을 망각해버렸습니다." 그는 "나무가 아래로 자라야만 위로도 자랄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하지만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정여울은 자신이 10여 년 간 읽은 문학, 철학, 역사, 심리학, 신화학 등에서 수많은 텍스트를 골라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 삶의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이들에게 건넨다.
이 지도는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던 작가 자신의 고민에 대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는 "공부할 권리는 숨을 쉴 권리만큼이나 소중한, 자존감의 근거"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공부란 "주어진 아픔을 견디는 수동적인 무기가 아니라 현실에 맞서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무기"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까지, '리어 왕'에서 '이방인'까지 그가 종횡무진 횡단했던 책 읽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일리아드'에서 점점 성장하는 영웅의 내면을 보여주고 '안티고네'는 슬픔을 통해 공동체의 가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나약함으로 숭고함을 쟁취한 윤동주 시인의 삶에선 내 안의 나약한 모습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때로는 쓰는 것보다 지우고 고치는 양이 더 많았던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빠른 시간 내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돕는다.
책은 '인간의 조건', '창조의 불꽃', '인생의 품격', '마음의 확장', '가치있는 삶' 총 5부로 구성됐다. 다루는 주제도 방대하다. 개인이 고독할 자유 혹은 나약하고 슬퍼할 권리를 살펴보는가 하면 연대와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긴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묻고 기억과 상처를 돌보는 법을 안내한다.
헤르만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진짜 내가 원하는 걸 찾는 여정이 삶의 공부"라고 했다. 공부는 오지선다형 질문에서 정해진 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또한,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권리를 되찾는 여정이다.
◇공부할 권리=정여울 지음. 민음사 펴냄. 352쪽/1만6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