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남편에게 인형으로 취급받는 아내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집을 뛰쳐나간다. 이후 노라는 자의식을 지닌 근대적인 여성상의 표본이자 여성해방의 상징이 된다.
한국의 '노라'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근대교육, 이른바 신식교육을 받고 새로운 여성의 상을 제시한 '신여성'이다.
1890년대 등장한 제1세대 근대여성은 박에스더, 차미리사, 윤정원이다. 차미리사는 "요사이 걸핏하면 이혼이니 무엇이니 하여 가정에 풍파가 끊일 날이 없는 것은 모두 여자 교육을 진심으로 요구하는 현상"이라며 파격적인 주장을 편다.
'신여성'이 본격 대두한 시기는 1920년대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고 주장한 나혜석을 필두로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 등 제2세대 근대여성이 나타난다. 민족주의·자유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이들은 신여성의 대표 집단으로 꼽힌다.
조금 더 넓은 범주의 신여성도 있다. 우봉운, 유영준, 정종명 등이다. 이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민족문제·계급문제·여성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것을 주장해 이른바 '사회주의 여성'으로 분류된다.
흔히 '신여성'하면 1920년대 신식 의복을 입고 유학을 다녀온 '모던걸'만을 떠오르지만 사실 이처럼 이념 지향이나 주장에 따라 다양한 집단으로 분류된다.
당대 여성들은 '인형의 집' 노라를 두고도 각기 다양하게 해석했다. 나혜석은 '인형의 가(歌)'라는 노래가사를 만들 정도로 노라를 동경한다. 윤심덕도 자신의 개성과 인격을 찾아 나간 노라를 찬미한다.
그러나 이광수의 부인인 허영순은 "노라 같은 이는 모성으로서 실패자"라고 비판했으며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인 정칠성도 "여성 해방의 길을 무산 계급 해방의 일환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등을 펴내며 근대 여성사 연구의 독보적인 역사학자로 자리매김한 김경일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는 이처럼 근대의 여성을 세 범주로 구분하고 인물별, 유형별로 샅샅이 분석한다.
책은 '신여성, 개념과 역사'란 제목에 충실하다. '신여성, 신여자, 모던걸, 무산부인, 노동 부인, 현대여성' 등 근대 여성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들의 의미와 사례를 설명한다. 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70년, 특히 역사적으로 '신여성'개념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 1900년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집중 조명한다.
신여성의 출현은 한국사회가 근대화되면서 나온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다. 여성 자신의 인격과 개성에 대한 존중,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정조에 대한 도전, 남녀평등과 여성 해방 등을 주장하며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설령 좌절로 끝났다고 해도 이들의 주장과 행동은 1920년대 시대 정신의 표출이자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시초가 됐다.
여성운동 혹은 근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기본에 충실한 안내서다.
◇ 신여성, 개념과 역사=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펴냄. 336쪽/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