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순수한' 피해자란 없다.

이해진 기자
2016.11.24 13:35

[따끈따끈 새책] '강간은 강간이다'…이 당연한 명제는 어떻게 부인되고 호도되는가

법원은 지난 5월 성인 남성 7명이 13세 지적장애 소녀를 모텔로 끌고 가 강제로 성관계 맺은 사건에 대해 '소녀가 성을 팔았다'고 판결했다. 소녀가 떡볶이를 얻어먹었고 숙박을 제공 받았다는 게 이유였다. 떡볶이를 '화대'로 받았으니 성폭행이 아닌 성매매라는 것. 당시 소녀의 나이는 13세2개월.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를 성폭행으로 처벌할 수 있는 13세를 딱 2개월 넘긴 나이였다.

"무슨 옷 입고 있었어?, 어째서 순순히 따라간 거야? 왜 '최선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어?". 강간 피해자가 용기를 내 사건을 고발했을 때 우리 사회는 강간범을 향해 죄를 추궁하는 대신 피해자에게 왜 범죄 피해를 입었는지 소명토록 한다.

만약 피해자가 술을 마셨거나 노출 있는 의상을 입었거나, 이밖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순수한 피해자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은 강간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어째서? "걔가 모텔까지 따라갔잖아. 그리고 정말 강간이었다면 떡볶이를 얻어먹었겠니?"

미국 여성 대상 범죄사건 전문 변호사이자 법학자인 조디 래피얼은 강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 '통계'로 맞선다. 감정과 편향을 제거했을 때에도 '강간은 여전히 강간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예를 들어 살면서 강제 삽입을 경험한 미국 여성은 연구에 따라 1210만~1800만 명에 달한다. 전체 여성의 10.6~16.1%이다. 매우 보수적으로 해석해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 강간 범죄만을 통계 낸 결과가 이렇다.

반면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응답한 피해 여성은 최대로 쳐도 20% 대에 머문다. 강력 범죄, 재산 피해 신고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치이다. 강간 피해자를 비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허위 강간 신고율도 예외 없다. 신뢰할 만한 연구들이 보여주는 허위 신고율은 2~8% 수준이다.

저자는 숫자에만 기대지 않는다. 다섯 명의 피해자를 심층 인터뷰했다. 그 결과 숫자는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더욱 추악한 진실이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 "더러운 창녀" 등의 모욕을 당했으며, 언론의 선정적인 묘사와 수사 과정에서의 무신경한 질문들로 재차 정신적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언어를 검열해야 했고, 검열된 말들마저 불신받은 끝에 사실상 발언권을 박탈당했다.

이 다섯 명의 생생한 증언을 듣다 보면 '강간은 사회적으로 탄생한다'는 뼈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잔혹한 범죄자의 손끝에서만 아니라 이 사회에 뿌리 박힌 강간에 대한 편견에서, 또 여러 사람의 공조 속에서 말이다.

◇강간은 강간이다=조디 래피얼 지음.최다인 옮김.글항아리 펴냄.340쪽/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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