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연극 '조씨고아'…리더의 자격을 묻다

박다해 기자
2017.01.26 18:09

올해 첫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찾은 명동예술극장은 추운 날씨에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연일 매진행렬을 기록하는 고선웅 연출의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때문이다.

2년 만에 무대에 오른 '조씨고아'가 인기를 끄는 건 뛰어난 작품성 덕이 크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연출, 주연 하성광을 포함한 배우들의 몰입감 높은 연기, 오브제를 활용한 간결한 무대 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연극은 권력에 눈이 먼 장군 '도안고'가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는 적수인 '조순'의 가문을 처단하면서 시작되는 복수극이다. 도안고는 왕인 '영공'에게 조순을 모함한다. 영공은 그의 간언을 곧이곧대로 듣고 조순의 일가 300명을 모두 죽인다. 마지막 남은 조씨 가문의 후손 '조씨고아'의 목숨까지 뺏기 위해 전국의 한 살배기 아기들을 색출해내기도 한다.

'조씨고아'를 거둬 기른 '정영'은 20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도안고를 향한 복수에 성공한다. 도안고의 탐욕을 알게 된 영공은 다시 명령을 내린다. 도안고의 일족 300명을 처단하라고 말이다. 결국 극은 피비린내 나는 보복으로 마무리된다.

작품은 복수의 의미와 허망함을 되짚는다. 동시에 영공이란 인물을 통해 리더의 자격을 묻는다. 고 연출은 "모든 문제의 발단은 '판단'에 있었다"며 "도안고가 (조순의) 9족을 멸해야 한다고 간언했을 때 영공이 조금만 지혜로운 생각을 했더라면 그 참화가 없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영공이 휘두른 권력의 칼날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파동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고선웅 연출가의 사연도 겹친다. 당초 고 연출도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박민권 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초연 당시 이 공연을 본 뒤 작품이 훌륭해 그를 명단에서 제외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작품은 절대 권력이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때 어떤 비극이 펼쳐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차라리 리스트 자체를 구겨버릴 순 없었을까, 세간에 ‘염병’ ‘삼대를 멸할’ 낯선 언어가 날아다니는 걸 보며 부질없는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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