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임신중지약의 도입이 공식화되며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진다. 낙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여 온 일부 교단은 시위·반대 서명 등 단체행동까지 나서고 있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종교계에 따르면 임신중지약 '미프진'(미프지미소정)의 도입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는 곳은 천주교계다. 천주교주교회의는 미프진의 도입 추진 직후 반대 성명을 내고 "(미프진이) 낙태를 제도화할 뿐 그 본질은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며 "생명 경시를 우리 사회에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천주교주교회의는 고위 성직자인 주교들의 모임으로, 직접적인 권한은 없지만 서울대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 대구대교구장인 조환길 대주교 등이 소속돼 있어 상징성이 뚜렷하다.
천주교계가 강경한 이유는 14억 신자를 관할하는 교황청이 줄곧 낙태를 금지해 왔기 때문이다. 교리에 따르면 태아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생명이기 때문에 인위적 낙태는 살인에 속한다. 전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도 수차례 낙태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냈다. 2021년에는 "낙태는 매우 추악한 습관이며 심각한 살인행위"라며 "이를 맡는 의사들은 살인청부업자"라고 말했다.
개신교계도 교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태아를 생명으로 인정하는 해석이 주류다. 그 때문에 낙태를 시도하려는 모든 행위가 살인과 같이 취급받는다. 국내 최대 규모의 개신교 연합기구인 한국교회총연합은 지난 17일 성명을 내고 "태중의 생명을 인간의 판단에 따라 종결지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면 안 된다"며 "단계적 낙태 유도 약물 도입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불교계는 다소 온건하지만, 낙태를 살인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해석은 같다. 살생을 금하는 계를 어겨 업보를 쌓게 하고, 태아의 영혼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다. 태아를 위한 영가 천도(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를 하는 절도 있다. 불교계 관계자는 "생명을 해치면 안 된다는 것은 불가의 첫째 계율"이라며 "예방이 최선이며, 불가피한 경우에도 악업을 쌓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계는 정부가 미프진 도입을 강행할 경우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이다. 천주교, 개신교계는 이미 반대 서명과 정부 탄원 등을 준비 중이다. 한 개신교 교단 관계자는 "낙태약 허용 추진은 개신교계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와의 합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며 "(허용될 경우) 일부 목회자와 신도 중심으로 이뤄지던 반대 시위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종교계에서는 내년 1분기로 예정한 미프진 공식 도입 전 숙려기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회적 논의의 장을 만들어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친 후 허가 방안의 재검토와 입법 공백 해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종교계와 여성계, 의료계가 함께하는 합의기구의 설치 주장도 있다.
일부 교단들은 교인 중에도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유연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기독교 여론조사기관 바나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기독교인 6명 중 1명은 낙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
천주교·불교·개신교 등 5개 종교 연합 단체의 한 관계자는 "낙태나 안락사 문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지만, 특정 종교의 입장만을 고수해서도 안 된다"며 "충분한 논의를 거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