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개천의 용과 통계의 날

유경준 통계청 청장
2015.08.31 03:20

이른바 ‘개천에서 난 용’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화제와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반석평이란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반석평은 서울에 살던 어느 참판댁의 어린 노비였다. 노비 신분이라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학문에 대한 열망이 강해 주인집 자제가 글을 읽는 것을 어깨 너머로 몰래 들으며 도둑 공부를 했다. 이를 가상히 여긴 주인은 이 어린 노비의 재주와 성품을 높이 사 글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아들이 없는 가난한 양반인 반서린의 양자로도 보내준다. 반석평은 중종 2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지금의 법무부 장관 격인 형조판서의 자리까지 올랐다.

내 주변에도 개천에서 난 용들이 많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궁벽한 산골이나 시골 마을에서 어렵게 공부해 간신히 실업고를 나왔으나, 생계를 위한 취업 후에 다시 대학을 진학하고 국비로 유학을 다녀와 성공한 지인들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고시를 패스해 판검사가 되거나 고위공무원이 된 친구들도 있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승진한 사람들도 많다. 개천룡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건강한 사회다. 그 사회는 누구에게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지는 열린 사회라 볼 수 있다.

왕정과 귀족 신분사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유럽은 신분이나 계층 상승에 미국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고 한다. 가난한 집안의 입양아였던 스티브 잡스처럼 말 그대로 개천룡이 미국에 많은 것도 미국이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많은 열린 사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모두에게 공평한 출발선이 주어졌다. 꿈과 노력만으로도 개천을 벗어난 용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사회였다. 이 용들이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개천룡이 점점 줄어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입시와 구직난에 처한 청년들은 용은 언감생심이고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2030세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헬조선(Hell Chosun)’이라고 부르기도 해 기성세대 입장에서 안타깝다. 우리나라가 젊은이들에게는 신분제도가 고착화된 조선사회와 유사하고 고통스러운 지옥과 같다는 의미가 담긴 자학에 가까운 신조어다.

젊은 세대가 용이 되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해법을 찾기 위해 우선 정확한 실태파악과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우선 부모의 부와 학벌이 자식 세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현상이 고착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통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간헐적으로 이에 대한 자료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한 세대를 적어도 20년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20년 이상 세대간 계층이동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통계는 거의 찾기 어렵다.

계층이동 통계 생산이 어려운 이유는 데이터 수집과 통계 작성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정보를 연결해야 하는 등 개인정보보호의 이슈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MB 정부 초기에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갈 수 있는 디딤돌인지 아니면 비정규직 자체가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대규모 통계 구축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에 한정한 잘못된 설계와 조급성으로 인하여 몇 년 후 슬그머니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향후 계층이동 통계가 만들어지면 효율적인 고용정책은 물론이고 계층 상승 사다리를 만드는 정책 수립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9월1일 제 21회 통계의 날을 맞아 통계청이 세대간, 계층간 이동 정도와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통계를 생산해 청년들이 다시 ‘용꿈’을 꿀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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