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성장의 DNA'…그때는 정부의 산업정책이 있었다

세종=정현수 기자
2025.06.19 03:45

[창간기획-新산업책략]<1>④

[편집자주] 산업정책의 시대가 돌아왔다. 기술 패권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다. 산업정책의 부활은 선진국이 주도한다. 한국의 설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산업 혁신은 사라졌고,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고민만 늘었다. 정부 주도 산업정책으로의 전환, 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1960~2000년 산업정책/그래픽=윤선정

1973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를 공식 선언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돼지털' 수출국에 불과했던 한국이 수출 100억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 본격적인 산업구조 전환에 나선다는 선언어있다.

'코리안 미러클' 등의 서적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설계자였던 오원철 당시 청와대 제2경제수석에게 "100억달러를 수출하려면 뭘 해야 하지?"라고 물었다. 오 수석은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그 답변이 중화학공업화 선언으로 이어졌다.

◇산업의 변곡점이었던 1970년대

1970년대는 우리 산업정책의 변곡점이었다. 급변하는 대내외 환경 속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수출은 빠르게 늘었고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1971년 10억 달러를 겨우 넘겼던 수출은 1977년 100억달러에 도달했다. 1972년 나온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상으로는 1981년의 수출 목표액이 53억달러였다.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추진하던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유신과 연결 짓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통상질서만 두고 보면 지금과 유사한 면이 적지 않다.

WTO(세계무역기구) 이전 세계무역 체제는 1947년 시작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였다. 세계무역 질서는 1960년대 일본의 부상 등으로 조금씩 변화를 맞이했다. 패권국이었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전 세계는 1970년대 두 번의 석유파동을 맞이한다.

석유파동은 GATT로 대표되는 자유무역 체제를 흔들었다. 이후 보호무역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대규모 감염병), 기술패권 등의 영향으로 자유무역 체제가 흔들리고, 경쟁적인 보호무역 체제가 등장한 지금과 닮았다.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그 시작

1970년대 우리 정부는 통상질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1960년대 경공업 중심의 산업정책을 펼쳤던 박정희 정부는 1967년 조선공업진흥법, 기계공업진흥법을 제정하며 중화학공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7년 설립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을 통해 인재 육성과 기술 개발에도 나섰다.

1970년대 경제성장률 추이/그래픽=윤선정

그리고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 6개 전략 분야를 선정했다. 중화학공업 정책은 전형적인 톱다운(Top-down) 방식의 산업정책이었다. 대기업에 대한 특혜, 과잉 투자 등 비판도 있지만 급변하는 대외 통상질서에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80년대 이후, 시장 중심으로 흐름 변화

1980년대부터는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바뀌었다. 시장의 자율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는 자유무역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1986년 '우루과이 라운드'가 시작되며 통상질서의 변화가 시작됐고, 1995년에는 GATT를 대신한 WTO가 출범한다. WTO는 자유무역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WTO 체제에선 산업정책의 양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산업정책은 크게 수평·수직적 산업정책으로 나뉜다. 수평적 산업정책은 R&D(연구·개발)와 같이 경제 전체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의미한다. 수직적 산업정책은 정부가 주도해 특정 분야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WTO 이후 자유무역 체제에선 수평적 산업정책이 대세였다.

◇정부보다 시장…'잊혀진' 산업정책

그러다보니 과거처럼 두드러진 산업정책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정부의 주요한 산업정책은 신기술과 연계됐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IT(정보기술), BT(바이오기술), NT(나노기술), ET(환경기술), CT(환경기술) 등 이른바 '5T 육성방안'을 제시했다. 유망기술과 미래 먹거리를 연계하려는 노력이었다.

수출 상위 10대 품목/그래픽=김지영

노무현 정부의 '10대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은 이를 계승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17대 신성장동력', 박근혜 정부의 ' 13대 미래성장동력' 등도 비슷한 고민에서 나온 정책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 '브랜드'에 밀려 산업정책으로서의 의미는 퇴색됐다. 일각에선 산업정책의 부재를 지적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2월 "일각에서 산업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정부의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미래차, 바이오헬스, 시스템반도체 등 이른바 '빅3 산업'을 전략산업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글로벌 흐름을 따라가진 못했다.

◇산업정책, 다시 전면에 나서야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대규모 감염병), 기술패권 경쟁 등을 거치며 주요국은 산업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유럽연합 '유럽 반도체법', 중국 '중국제조 2025'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은 뚜렷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과는 미래 먹거리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수출 상위 10대 품목을 2004년과 비교하면 10개 중 8개가 겹친다. 순위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산업구조의 혁신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산업정책을 다시 전면에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구자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첨단기술과 신기술, 기후변화 등은 산업화까지 시간과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정부가 인내 자본(Patient Capital)의 역할을 한다"며 "지금 시점에선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에겐 산업정책을 통해 성장한 DNA가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