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다시 'I'(Inflation)의 공포 앞에 섰다. 깨어난 I가 저성장과 고물가가 동시에 덮치는 S(Stagflation)로 확산될 가능성도 커졌다. 정부는 올해 물가가 2%대 초반에 머물 것으로 봤지만, 중동 전쟁 이후 유가와 환율이 동시에 치솟으며 물가 전망의 전제부터 빠르게 무너진다.
한국은행은 지난 2월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2%로 제시했다. 물가안정목표인 2%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이다. 한은이 전망 당시 깔아둔 국제유가 전제는 브렌트유 기준 연평균 배럴당 64달러였지만, 지난달 말 115달러 안팎까지 치솟았다. 두바이유 평균 가격은 2월 배럴당 68.4달러에서 3월 128.5달러로 87.9% 올랐으며 같은기간 평균 원/달러 환율은 1448원에서 1493원으로 3.1%상승했다.
농산물 가격 하락과 석유최고가격제 영향으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2%에 머물렀지만 석유류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9.9% 올라 2022년 10월 이후 3년 5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석유류의 전체 물가 기여도도 -0.09%포인트에서 0.39%포인트로 급반전했다. 4월부턴 국제항공료 인상 등 유가 상승분이 시차를 두고 반영될 가능성이 커 물가 불안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유가와 환율이 동시에 뛰면 수입물가가 오르고 그 영향은 생산자물가를 거쳐 소비자물가로 번진다.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에는 특히 치명적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3월 보고서에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으로 오를 경우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0.3%포인트 낮아지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1%포인트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가가 150달러까지 오르면 성장률은 0.8%포인트 하락하고 물가는 2.9%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놨다.
대외기관의 경고도 같은 방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7%로 낮추고,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2.7%로 높였다. 성장률은 기존보다 0.4%포인트 낮아졌고 물가는 0.9%포인트 상향 조정됐다. 성장은 둔화하는데 물가는 오르는 비용발 인플레이션 압력이 한국 경제를 다시 덮치고 있다는 뜻이다.
환율 변수도 심상치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최근의 환율 변동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원/달러 환율을 1452.7원(지난해 1분기 평균)을 기준으로 두고 1500원으로 오를 경우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시차를 두고 최대 0.24%포인트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봤다. 원화 약세는 수입단가를 끌어올리고, 기업의 생산비 부담을 높여 결국 생활물가를 자극한다.
실제로 2월 생산자물가는 6개월 연속 상승했고, 수입물가도 8개월째 오름세를 이어갔다. 기대인플레이션도 다시 꿈틀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소비자물가가 본격적으로 뛰기 전 나타나는 전형적인 전조현상이다.
한국 경제는 팬데믹 이후 간신히 진정되는 듯했던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 공포에 다시 서게 됐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본부장은 "국제 유가 상승으로 국제수지 악화, 물가 상승, 기업 비용 증가 등으로 소비와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며 장기화 시 내수 침체와 수출 둔화를 동시에 자극해 스태그플레이션형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중동 전쟁 이후 유가, 환율, 기대인플레이션이 모두 오르고 기존 전망의 전제가 무너진 만큼 물가당국도 더 이상 "물가가 2%대 초반에서 안정될 것"이라는 낙관에 머물 수 없게 됐다. 다시 금리 인상을 포함한 통화정책 재점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