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 제품에 대한 제재 유예를 한 달 더 연장하면서 고사 위기에 처한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 귀중한 '숨구멍'이 열렸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원료 수급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없는 '극동 노선'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 유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20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 재무부는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 제품을 선적한 선박에 대해 다음 달 16일까지 판매를 승인하는 일반면허를 발급했다. 국제 유가 급등과 인플레이션 압박 속에 미국이 '공급 안정'을 위해 내린 실리적 결단이다.
이번 연장 조치에 앞서 우리 정부는 국내 기업들이 불필요한 제재 위반 리스크에 노출되지 않도록 미 재무부와 긴밀한 사전 협의를 진행해 왔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미 재무부로부터 "적법한 유예 기간 내에 체결된 계약과 도입 물량은 제재 대상이 아니다"라는 유권해석을 받아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내 주요 석화사가 러시아산 나프타 수만 톤을 안전하게 수입한 선례도 확보했다. 정부의 이 같은 적극적인 행정 지원은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덜고 추가 계약에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업계에서는 이번 유예를 통해 도입될 러시아산 물량이 정부가 확보한 대체재의 한계를 메울 '안전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중동 순방을 통해 나프타를 최대 210만 톤 확보하는 성과를 냈으나 이는 지난해 국내 내수량 약 3340만 톤의 약 6%에 불과하다. 월평균 소비량이 278만 톤임을 감안하면 한 달 치 수요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
더 큰 문제는 '물길'과 '시간'이다. 정부가 확보한 중동산 물량은 이란이 장악한 호르무즈 해협이나 분쟁이 끊이지 않는 남중국해를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 도입까지 20일 이상 소요된다. 반면, 코스미노나 나홋카 등 극동 러시아 항구에서 출발하는 나프타는 동해를 통해 2~3일이면 국내 항구에 도착한다. 세계 에너지 공급망의 화약고를 모두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쇼트컷(Short-cut)'인 셈이다.
특히 이번 유예 조치는 다음 달 16일까지로 기한이 매우 짧아 국내 기업들의 승부처는 현재 공해상에 떠 있거나 극동 항구에 즉시 출항 가능한 '현물(Spot)' 물량을 얼마나 빠르게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리적 인접성 덕분에 유예 종료 직전까지도 입항이 가능하다는 점이 러시아산의 가장 큰 강점이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확보한 210만 톤이 4월 말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호르무즈 상황에 따라 도입 시기가 불확실해질 수 있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기업들은 한 달이라는 짧은 윈도 내에 입항시키기 위해 공해상의 러시아산 선박을 추적하며 물량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전했다.
안세현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은 이제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에너지 안보를 위한 정책적 선택지가 됐다"며 "유예 기간 동안 극동 노선을 최대한 활용해 재고를 비축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정교한 조율을 통해 이 루트를 안정화하는 외교력이 절실하다"고 제언했다.
국내 정유 4사, 주요 석화사들은 이번 유예 연장에 맞춰 자체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극동발 물량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업계는 정부가 확보한 대체 물량과 러시아산 '안보 물량'이 시너지를 낼 경우 최악의 원료난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