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 내성은 '조용한 팬데믹( pandemic)'이라 불리지만, 현장에선 절대 조용히 퍼지지 않습니다."
지난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정기총회 2차 본회의장.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한다는 '팬데믹'이라는 말이 나오자 장내에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183개국 대표단이 함께한 회의장 대형 스크린에는 항생제 내성(AMR·Antimicrobial Resistance) 대응 전략이 연이어 띄워졌다. WOAH 항생제내성작업반 의장 아르슈니 무들리(Arshnee Moodley) 박사는 "항생제 내성은 동물보건 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공중보건과 식량안보를 동시에 위협하는 위험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항생제 내성 대응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부상한 가운데 한국의 역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WOAH는 이달 18~22일 열린 제93차 정기총회에서 농림축산검역본부를 '육상동물 항생제 내성 협력센터'로 지정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전 세계적으로는 기존 일본·케냐에 한국·이집트가 합류하며 4개국 체제로 확대됐다.
◆ 아·태지역 항생제 내성 대응 거점 역할 맡은 한국
항생제 내성은 항생제를 장기간·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세균이 약효를 견디게 되는 현상이다.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 반코마이신 내성 장알균(VRE) 같은 이른바 '슈퍼박테리아'가 대표적이다. 내성균에 감염되면 기존 항생제가 잘 듣지 않아 치료가 어려워지고 대응 시기를 놓치기 쉽다.
항생 물질이나 약물에 견디는 힘이 강한 내성균은 축산 현장에서 발호할 수 있다. 가축 사육 과정에서 항생제가 과도하게 사용되면 내성균이 축산물을 거쳐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국가 항생제 사용 및 내성 모니터링-동물, 축산물' 자료를 보면 2024년 국내 축산·반려동물용 항생제 판매량은 약 850톤(t)에 달했다. 축종별로는 돼지가 595t(69.8%)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최우선 중요항생제인 3·4세대 세팔로스포린 계열은 전년 대비 40% 증가해 내성 관리의 시급성을 보여준다.
이번 협력센터 지정으로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항생제 내성 대응 거점 역할을 맡게 됐다. 검역본부는 10여 년간 동물 항생제 내성 관련 연구를 이어오며 전문성을 축적해 왔다. 매년 항생제 내성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적정 사용 모델과 가이드라인도 개발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미얀마·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 아시아 국가 실무자를 대상으로 기술 훈련도 진행했다.
협력센터 지정은 WOAH 사무국과 분야별 전문가위원회, 이사회 등의 심사를 거쳐 회원국 총회에서 최종 확정된다. 한국은 지난해 상반기 관련 절차에 착수해 이번 총회에서 최종 지정됐다.
총회에 참석한 농림축산검역본부 질병진단과 이경기 수의연구관은 "협력센터 지정은 우리의 기술력과 국제 활동을 세계가 인정한 결과"라며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그에 걸맞은 역할과 책임을 맡게 됐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 수생동물 표준물질 진단도 세계 선도
수생동물 분야에서도 한국의 국제적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과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제91차 WOAH 정기총회에서 세계 최초로 '유전자 진단 표준물질' 분야 협력센터로 지정됐다. 유전자 진단 표준물질은 수산생물 질병 진단 과정에서 거짓양성·거짓음성 같은 오류를 줄이는 기준 물질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이 협력센터의 활성화 방안도 주요 과제로 다뤄졌다. 지난해 협력센터 지정 이후 칠레·페루·에콰도르 등 남미 3개국에 진단 표준물질을 공여했고, 활용 사례는 WOAH 수생동물위원회와 공유됐다. 이를 바탕으로 회원국 대상 보급 확대와 국제 표준화 방향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우리 정부의 동물방역 위상도 전반적으로 강화됐다. 우리나라는 이번 총회에서 아프리카마역, 소해면상뇌증(BSE), 가성우역 청정국 지위와 제주도 구제역 청정지역 지위를 재인정받았다. 특히 지난해 제주도가 획득한 구제역 청정지역 지위는 우리나라 구제역 방역관리 수준을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올해 총회에서도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방역 역량을 재확인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36개 회원국 중 10개국으로 구성된 핵심그룹에도 이름을 올렸다. 핵심그룹은 지역 주요 의제와 협력 사안을 사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부는 내년 7월쯤 한국에서 한·중·일 수석수의관(CVO) 회의를 열고 동아시아 지역 동물질병 공동 대응과 정보 공유 체계 강화 방안도 논의할 계획이다.
이동식 농림축산식품부 방역정책국장은 "이번 총회는 우리 정부의 동물질병 관리 역량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아시아·태평양 지역 핵심그룹 일원으로서 동물방역·검역 분야 국제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